샤르트뢰즈 자연공원에서 만난 용담 군락.
샤르트뢰즈 자연공원에서 만난 용담 군락.
알프스를 눈에 담고 '천상의 화원' 거닐다
어릴 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서 ‘천상의 화원’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국내에는 야생화 천국이라고 해도 그 크기가 한계가 있다. 1500m가량인 수목한계선보다 높은 고원이 별로 없는 데다 수십년간의 열성적인 조림(造林)으로 산이란 풀과 나무가 공존하는 곳이 아니라 나무가 사는 곳으로 인식돼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한마디로 풀이 살 곳이 너무 제한돼 있고, 면적도 좁아 많은 탐방객을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리산 노고단, 세석평전이나 한라산의 진달래능선 대피소 위쪽은 상당히 넓긴 하지만 이런 풀들의 세상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건장한 청년들이 아니면 어렵다.

그러나 외국에는 차로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든지, 등반철도나 케이블카를 타고 일단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트레킹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고도 차이가 2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고원을 거니는 것이어서 큰 부담이 없다. 그래서 야생화가 좋다는 프랑스의 고원지대를 구글에서 찾아 개인적으로 돌아다녀봤다.

프랑스에서 목축으로 먹고사는 곳, 풀밭이 지천인 곳은 동부의 론알프스 지역과 오베르뉴 지역이다. 여기에는 자연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많다. 그 넓은 공원을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래서 야생화 풍경이 제일 좋다는 한 곳씩을 골라 가보기로 했다.
금매화
금매화
호수와 시내, 몽블랑까지 한눈에

프랑스 동부의 안시는 아름다운 호수를 담은 도시다. 평창과 더불어 2018년 동계올림픽의 최종 후보지였다. 평창이 아니었다면 동계올림픽 개최지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조개나물
조개나물
묘한 감흥을 주는 안시를 지나 남쪽으로 18㎞쯤 떨어진 마시프 데 보주 자연공원 북쪽의 크레 드 샤티용으로 향했다. 프랑스보다는 스위스, 이탈리아와 더 가까운 곳이다. 매년 7월 세계적인 프로 도로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가 열리는 프랑스답게 걷는 사람보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내리는 이들이 많았다.

안시에서 D41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레 로셰 블랑 호텔 근처에 차를 세우고 마음 내키는 대로 걸었다. 인근 식당에서 점심으로 달걀과 햄에 이 지방 특산 치즈를 넣은 샐러드를 먹었다. 가까이에 치즈 등을 파는 농가도 있다. 해발 1650m 정도의 고원에 이르자 안시 호수와 시내는 물론 멀리 몽블랑까지 보였다. 처음에는 풀밖에 안 보였지만 걷다 보니 온갖 꽃이 다 피어 있다.

점나도나물
점나도나물
신비로운 푸른빛이 도는 용담(龍膽)을 비롯해 아네모네(바람꽃), 베로니카(개불알풀), 동의나물, 미나리냉이 등 40여종의 꽃이 자생한다.

레 콩브는 마시프 데 보주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다 보면 나오는 작은 마을 중 하나다. 이 지역에는 주변 전체가 목초지이자 그대로 꽃밭인 곳이 있다. 미나리아재비, 쥐손이풀이 주종이었고 장구채, 솔체꽃, 분홍 토끼풀 등이 뒤섞여 있었다. 장구채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거의 져버린 터라 좀 아쉬웠다.

부근에 타미에 수도원이 있는데 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부근 길을 걸으면 많은 꽃을 볼 수 있다. 기념품 가게에는 온갖 종류의 베리로 담근 술을 팔고 있다. ‘수도원길’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성당은 수도원답게 소박했고 길가에 있는 성모상이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게 했다.

잔설과 어우러진 크로커스

수선화
수선화
레 콩브에서 남쪽으로 60㎞쯤 내려가면 콜 드 라 마들렌이 나온다. 해발 2000m 높이의 고원으로 정상에 있는 작은 탑이 고도를 알려준다.

프랑스어로 콜(col)은 좁아지는 부분을 뜻하는데 우리말로 바꾸면 고개(嶺·령)에 해당한다. 이곳에 봄을 알리는 꽃인 크로커스(crocus)가 만발해 있었다. 크로커스의 꽃말은 ‘청춘의 환희’다. 그 이름대로 들판에 활짝 핀 크로커스가 처음 눈에 띄었을 때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산 곳곳에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초롱꽃과
초롱꽃과
내려가는 길 해발 1450m 지점에 이르자 생 프랑수아 롱샴이라는 마을이 나왔다. 주변에 거미줄처럼 스키 리프트가 얽혀 있고 거대한 호텔부터 작은 민박집까지 많은 숙박업소가 있어 머물기 좋다.

다시 남쪽으로 71㎞쯤 내려가니 콜 뒤 갈리비에에 도착했다. 이곳에 가려면 1차선 터널을 지나야 한다. 신호등에 따라 양방향 차량들이 교대로 통행하는 곳이다. 터널 남쪽에 휴게소와 기념품가게가 있어 여기서 잠시 쉬었다. 프랑스에서는 시골에 가면 콜라에 넣을 얼음이 없거나 있더라도 무척 아낀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얼음이 없다고 해서 가게 옆에 쌓인 눈을 컵에 담았다. 다 마실 때까지 거의 그대로 남은 눈얼음은 별미였다.

다음 목적지인 콜 뒤 로타레에 도착할 때까지 도저히 그냥 달릴 수가 없었다. 곳곳에 환상적인 꽃밭이 있고 비교적 차를 세울 만한 공간을 찾기도 쉬워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조용한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곳

알프스를 눈에 담고 '천상의 화원' 거닐다
프랑스 동남부 론알프스 지방의 제2도시 그르노블 바로 북쪽에 샤르트뢰즈 자연공원이 있다. 콜 뒤 로타레에서 서쪽으로 세 시간 정도 거리다. 안에는 2000m급의 봉우리가 즐비하다.

200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의 촬영지인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이 이곳에 있다. 수도원은 11세기에 브루노 성인(St. Bruno)이 창립한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본원이다. 이곳은 수도자들의 기도처로만 존재한다. 영화 제작진이 10여년에 걸친 설득 끝에 수도자들의 모습을 담아 세상에 담은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수도사들의 조용한 일상을 담고 있다. 제목처럼 대사가 거의 없고 성경 읽기, 기도, 예배, 식사 등으로 이뤄지는 수도사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느린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영화로 바쁜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샤르트뢰즈 자연공원에서 만난 용담 군락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 보는 꽃도 여럿 있었다. 트레킹을 해도 좋다. 관광안내소에서 주는 지도로는 부족하다. 이왕 걷는다면 제대로 된 지도를 사는 게 좋다. 7유로를 주고 산 지도에는 공원 전체의 트레킹 코스가 나와 있었다. 모두 돌려면 열흘이 있어도 모자랄 듯싶다.

야생화 트레킹 코스의 절경 속으로

알프스를 눈에 담고 '천상의 화원' 거닐다
그르노블에서 서쪽으로 173㎞ 떨어진 곳에 있는 라샹 라파엘로 향했다. 일요일 아침이어서 식사할 곳을 찾느라 고생해야 했다. 길가에 있는 카페에서 메뉴에 있지도 않은 음식을 주인 부부가 차려주는 대로 먹고 나섰다.

라샹 라파엘에 가니 장이 섰다. 세계 모든 시장은 현지의 생활상을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웬만한 마을에는 주말마다 장이 선다. 과일, 빵, 치즈, 햄 등을 사기 좋다. 산을 헤매다 보면 밥 먹을 곳이 마땅치 않으므로 비상식량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과일은 잘 상하지 않기 때문에 갖고 다니면 도움이 된다. 물은 항상 넉넉하게 싣고 다녀야 하며, 식당이 있는 경우라도 오후 2시 전에는 앉아서 주문하는 것이 안전하다. 마감시간이 되면 가차없이 영업을 중단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마을 앞에는 정상에 십자가 세 개가 서 있는 산이 있었다. 해발 1441m의 쉬크 드 몽티베르누다. 국립공원이나 자연공원 구역에 속하지 않지만 최고의 야생화 트레킹 코스라 해도 무방할 만큼 아름다웠다. 20가구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 너무 예뻐서 특히 그렇다.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와인을

일정 중 이틀은 그르노블에서 동쪽으로 280㎞ 떨어진 오베르뉴의 민박집에서 묵었다. 방은 세 개뿐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했던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다. 식전에 한 시간 반이나 와인을 같이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안주인이 아주 씩씩했다. 1주일 이상 밀린 빨래를 해주고, 뜰에 널어 말리고 반듯이 개어주기까지 했다. 세탁비는 10유로.

오베르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리브라두아-포레 지역 자연공원에서 동쪽 끝에 해당하는 콜 데 쉬페이르로 갔다. 멀리서 보고 풀이 무성하다고 그냥 떠났으면 후회할 뻔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토끼풀, 수선, 바람꽃, 베로니카, 범꼬리, 제비꽃, 벌노랑이, 물망초, 콩과의 넝쿨 등 다양한 식물이 공존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야생화는 그들의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야 모습을 드러낸다.

콜 데 쉬페이르로 가는 길에 있는 르 페리에는 수레국화의 천국이었다.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너비의 비포장 길을 따라 꽃이 피어 있으며 모든 꽃이 크고 싱싱해 보였다. 이 지역에 들른다면 칼로 유명한 티에르의 고색창연한 구시가지를 거닐어보는 것도 좋다.

여행 Tip

유럽에서는 큰 차를 몰고 다니면 주차가 어렵기 때문에 작은 차를 빌리는 것이 좋다. 그러나 가방을 실을 트렁크의 용적과 항상 산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경차는 권하기 어렵다. 힘 좋은 디젤 소형차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 자동 변속기 차가 많지 않기 때문에 미리 알아보는 것이 현명하다.

가끔 산악지역에는 전류가 흐르는 철사 울타리가 쳐져 있다. 방심하다 울타리 철사에 닿으면 상당한 전기충격을 받게 되니 조심해야 한다.

그르노블=글·사진/박병원 객원 대기자·한국경총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