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이 걸렸다 하면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적용돼온 배임죄가 최고 법원인 대법원에서 잇따라 제동이 걸리고 있다. 김승연 한화 회장에 이어 이재현 CJ 회장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한 주된 이유가 배임죄에 대한 2심의 잘못된 판단이다. 이에 따라 배임죄에 대한 법원의 인식에 변화가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법조계 관계자는 “다수의 대법관이 배임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반 법관들도 배임죄 사건을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0일 이 회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감지된다.

재판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배임으로 인한 특정경제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제3조 위반죄는 이득액(5억원 이상~50억원 이상)에 따라 형벌도 매우 가중되어 있으므로 취득한 이득액을 엄격하고 신중하게 산정해야 한다”며 원심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했다.

김 회장 재판에서도 대법원은 일부 지급보증분에 대해 “새로운 손해를 발생시킬 위험이 초래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배임죄를 엄격히 적용해 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해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 처벌하는 범죄다. 하지만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 등 처벌기준이 모호한 데다 실제 손해발생 여부와 무관하게 손해를 끼칠 위험만 생겨도 형사처벌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반기업 법조항’으로 지적되고 있다.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 등이 최근 ‘손해를 입힐 목적으로 임무를 위배한 행위’만 처벌하도록 형법개정안을 발의한 이유다.

그러나 배임죄에 대한 법원의 인식변화를 단정짓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재판부는 이날 배임죄 자체에 대한 판단은 유보했다. 이 회장의 한 변호인은 “상고이유에 배임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적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재판부가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았다”며 “법원이 배임죄에 대해 고민은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기존의 판례를 바꾸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계와 일부 학계에서는 “정상적인 경영판단까지 배임죄로 처벌하는 것은 기업인의 경영활동을 위축시키는 과도한 형사적 개입”이라며 ‘배임죄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