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이영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이 전혁림 화백의 ‘기둥 사이로 보이는 한려수도’를 감상하고 있다.
용인 이영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이 전혁림 화백의 ‘기둥 사이로 보이는 한려수도’를 감상하고 있다.
“누구나 마지막 바라는 것이 있겠지만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쓰러져 숨을 거두는 것이 내 소원이다. 화필을 들고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면 우리 민족의 선율이 들려온다. 이제는 서울이란 미술 경기장에서 내 고향 통영을 녹여내고 싶다.”

‘색채추상의 마술사’로 불리는 전혁림 화백(1915~2010)이 1970년대 처음 서울 화단에 입성할 당시 가졌던 포부다. “통영의 아름다움을 서울 화단에 알리려 항상 새로운 눈으로, 처음 뜨는 눈으로 작업할 것”이라고 그는 다짐했다. “예술이란 고향의 선율”이라고 말한 전 화백은 향토 이미지를 동양적인 우주관으로 담아냈다.

전 화백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 회고전이 지난 10일부터 경기 용인 이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통영시가 펼치는 ‘전혁림 화백 탄생 100주년 예술제’의 하나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는 통영의 바다 풍경부터 목기, 보자기, 나무오리 등의 기물을 해체해 재구성한 추상화까지 70여년간 작업한 대표작 300여점이 나왔다. 전시는 오는 12월31일까지.

전 화백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상황 탓에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시인 김춘수, 음악가 윤이상 등 통영 출신 예술인과도 교분을 나눈 그가 서울 화단에 데뷔한 것은 회갑을 맞은 1975년.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뽑혔으며 2005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로 7m 크기의 대작 ‘통영항’을 구입, 청와대 인왕홀에 전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90세를 넘어서까지 활발하게 작업했던 그는 그림과 목기, 도자기 등 30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스스로를 ‘환쟁이’라고 불렀던 전 화백의 그림에는 통영 앞바다와 고기잡이 배, 기러기 등 향토적 소재들이 빨강 파랑 등의 오방색과 함께 담겼다. 문학과 사상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미술은 철학(사상)과 문학적인 질감(이야기)이 살아 있어야 움직인다. 젊은 시절 헤밍웨이, 헤세, 칸트, 헤겔 등의 문학과 철학서를 탐독했던 것이 그림의 자양분이 됐다”고 그는 설명했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전 화백의 작업은 한국미술의 일반적인 흐름에서 보면 터무니없이 일탈적이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짜인 화면을 구사했다. 1980년대 중앙 화단의 획일적이고 집단적인 백색 단색화나 민중미술, 혹은 리얼리즘 경향을 무시하고 컬러풀한 추상화의 경향을 보여줬다.

전 화백의 작업은 2005년부터 또다시 변화한다. 화면이 다소 밝아진 데다 다양한 색면에 나비 새 등 사물을 집어넣거나 달과 해, 파도 등의 위치 변화를 시도했다. 코발트블루와 핑크, 베이지 등으로 구성된 화면은 발랄하기까지 하다. 전통 민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부활시킨 ‘민화적 풍물도’ ‘새 만다라(曼陀羅)’ ‘코리아 판타지’ ‘기둥 사이로 보이는 한려수도’ 등의 출품작은 작고하기 직전에 그린 작품이다.

전 화백의 작품이 관람객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뭘까. 전통 오방색이 주는 색채효과 때문이라는 게 미술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이환 이영미술관장은 “추상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출몰하는 향토성, 놀랄 만큼 풍부한 색채 감각은 통영의 이미지인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한국적 풍토와 정신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김후란 정진규 정현종 이근배 유안진 신달자 나태주 강은교 등 문인 30여명이 전 화백의 작품을 본 느낌을 시로 쓴 ‘화시전(畵詩展)’, 목기와 도자 회화전도 함께 열리고 있다. (031)213-8223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