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인 1985년 9월, 선진 5개국 재무장관회의를 통해 전격적으로 발표된 플라자 합의는 한국 경제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도약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합의 이후 시작된 엄청난 엔고를 경험하면서 장기불황의 터널로 접어들었다. 달러당 240엔이던 환율이 3년여 만에 120엔이 된 충격을 이겨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대한민국호는 1986년 2000달러대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이후 10여년간 매년 1000달러 정도씩 상승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1995년 1만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런 고속성장 국면은 외환위기 이후 한풀 꺾이면서 중속성장 국면으로 바뀌었고 외환위기 이후 10년이 지나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저속성장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다. 일본은 장기불황 터널을 빠져나오는 조짐이 보이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일본식 장기불황 국면으로 서서히 접어드는 모습이다.

이제 고속성장 시대에 만든 제도나 시스템이 낡은 옷처럼 바뀌어 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연공급 구조다. 입사 후 매년 자동적으로 급여가 올라가는 연공급제는 고성장 시대에는 잘 맞는 제도다. 매년 성장률이 두 자릿수면 인건비의 자동적 증액을 충분히 견딜 수 있다. 저성장 국면에서는 다르다. 매출이 잘 늘지도 않고 신규 인력을 뽑을 여력도 없는데 인건비 총액이 호봉상승분만큼 자동적으로 올라간다면 기업 조직이 이를 감당하기 힘들다. 더구나 우리는 퇴직할 때쯤 되면 급여가 입사 당시 대비 세 배까지 증가한다. 생산성은 이미 낮아지고 있는 선임 직원 한 명이 신입 직원 세 명분을 챙기고 있다면 이는 문제가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정년연장 조치까지 취해진 상황이다. 한국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정년연장으로 인한 임금 상승분은 약 107조원이다. 임금피크제를 하면 26조원이 절감된다. 임금피크제가 실시돼도 여전히 90여조원의 부담이 기업들에 추가로 주어진다.

월급을 받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월급을 주는 법인도 고려해야 된다. 월급을 주는 법인이 골병이 들면 정년이 얼마 안 남은 선임들은 그나마 손실이 덜할지 모르지만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화려한 미래를 꿈꾸고 있는 새파란 신입 직원들은 입장이 다르다. 기업 조직도 사람 몸과 비슷해서 무리하면 탈이 나고 심한 경우 쓰러지고 최악 땐 사망하기도 한다. 기업 조직이 건강하고 오래 버티면서 수많은 인력들에게 지속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도록 선배들이 도와야 하는데 오히려 무리한 요구를 해서 조직의 건강을 해치면 후배들은 의지할 데가 없어진다. 일본도 1990년대에 노동개혁이 부진해지면서 불황의 늪에 더욱 깊숙이 빠져든 바 있다.

이제 우리는 30여년의 차이를 두고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일본의 1990년대를 닮아가기 시작하는 우리 앞에 장기불황의 터널이 보이고 있다. 금번 노동개혁을 둘러싼 논의는 이제 저성장기 내지 장기불황으로 접어드는 한국 경제가 미리 안전벨트를 매듯 최악의 상태에 대비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조치로 봐야 한다.

얼마 전 세계적 신용평가사 S&P의 폴 시어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보고서를 통해 중국의 최근 경제 상황이 ‘1990년대 일본’이 아니라 ‘1960년대 일본’을 더 닮았다는 지적을 했다. 중국은 1960년대 일본처럼 일시적인 경기둔화 이후 다시 성장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중국이 ‘1960년대 일본’이라면 우리는 ‘1990년대 일본’을 닮았다. 우리의 앞날은 자꾸만 암울해지고 있다. 삼촌 아빠들에게 자제해달라는 청년들의 목소리도 잘 들어야 하고 회사 바로 옆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미래를 꿈꾸는 후배들 생각도 해줘야 한다.

저성장기가 도래하는 지금 여름에 맞게 지어진 집을 겨울에 맞게 에너지 절약형으로 바꾸어주고 수도관도 잘 싸매야 한다. 이 작업이 제대로 안 돼 수도관이 동파되면 우리의 차세대는 물 마실 데도 없어진다. 다가오는 빙하기에 기업 조직의 건강을 챙기지 못하면 우리 차세대의 미래가 없어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때다.

윤창현 < 서울시립대 교수·전 한국금융연구원장 chyun3344@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