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한복은 색이 시작이자 끝…아름다움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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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한복 인생 돌아보는 기획전 연 이영희 디자이너
마흔 살 넘어 한복의 길로
세 아이의 어머니로 평범한 삶…"우연과도 같은 필연, 운명이었죠"
파리 패션쇼 첫 한국인
치마만 입는 '바람의 옷' 돌풍…세계화 구호만, 실천 아쉬워
마흔 살 넘어 한복의 길로
세 아이의 어머니로 평범한 삶…"우연과도 같은 필연, 운명이었죠"
파리 패션쇼 첫 한국인
치마만 입는 '바람의 옷' 돌풍…세계화 구호만, 실천 아쉬워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https://img.hankyung.com/photo/201509/AA.10582287.1.jpg)
행사 전 서울 신사동 매장에서 이씨를 만났다. 그는 에밀레종 표면의 무늬가 그려진 쑥색 치마를 펼쳐 보였다. “흰 천에 파라핀으로 무늬를 먼저 그린 뒤 붓으로 색을 칠하는 방식으로 염색한 것”이라며 “이런 염색 방식은 기계로는 절대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한복은 색이 시작이자 끝”이라며 “나는 언제나 색에 미쳐 있고, 늘 ‘이영희만의 색’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장 좋아하고 즐겨 쓰는 색은 회색이다. “양복을 디자인할 땐 검은색과 흰색을 주로 쓰지만, 한복에선 그 두 색의 대비가 너무 강해 다른 색과 조화되기 힘듭니다. 회색은 한복을 디자인할 때 어떤 색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 어울림의 정신이 제가 40년 동안 한복을 제작해 온 마음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이씨는 자신이 한복과 연을 맺은 계기에 대해 “우연과도 같은 필연이고, 운명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직접 옷감을 짜서 염색하고, 바느질하는 모습을 늘 보며 자랐다. 23세 때 군인의 아내가 됐고, 세 아이의 어머니로 살았다. 그러다 사촌 올케언니가 “명주솜 이불을 함께 지어보자”고 제안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비단의 일종인 뉴똥 원단을 직접 염색해 이불싸개를 완성했어요. 인기 폭발이었죠. 그걸 계기로 한복 짓기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배워 보자’는 마음으로 당시 집 근처에 살고 있던 전통복식사학자 석주선 선생을 찾아갔다. 기본적인 치마저고리를 비롯해 기녀복과 대례복, 장신구와 신발 등 한복 관련 지식을 쌓아갔다. 40세였던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한복 가게를 운영했다. 천연 염색 원단과 특유의 디자인으로 입소문을 탔다. 역대 영부인을 비롯한 명사들도 그의 옷을 주문했다.
“한복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마음에 한복을 팔아 모은 재산을 모두 털어 1993년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패션쇼 무대에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참가했다. 이듬해엔 저고리 없이 치마만 있는 ‘바람의 옷’을 내놓았다. 당시 르몽드의 패션기자였던 로랑스 베나임이 붙인 이름이다. 국내에선 “저건 한복이 아니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파리 현지에선 “이토록 아름다운 색채는 처음 봤다”는 찬사를 받았다. “주변에서 ‘전통을 무너뜨린 사람’이라고 매도할 때 가장 응원해준 사람이 석주선 선생님이었어요. ‘새로운 전통을 창조해 가는 게 당연하다’ 하셨죠. ‘바람의 옷’은 제 아이콘과 같습니다.”
정규 디자인 공부를 하지 않은 40세 가정주부는 그렇게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거듭났다. 2004년 미국 뉴욕에 ‘이영희 한복박물관’을 열었고, 2010년과 2012년엔 파리에서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패션쇼를 했다. 한산모시와 플래티넘 원사(原絲) 등 최고급 재료로 작품으로서의 고급 한복도 내놨다.
하지만 이씨는 “한복이 대중화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먹방(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만 하지 말고, 한복에도 그만큼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전통문화에 대한 탄탄한 이해와 기본기가 있어야 모던함을 가미한 디자인 혁신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한복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구호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실천과 국가 지원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어요. 제 작품을 보고 한복의 아름다움을 전할 사명감을 가지는 젊은이들이 나온다면 제 평생 여한이 없습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