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남자는 가족을 위해 중동으로 떠났고 여자는 파독 간호사를 꿈꿨다. 2015년,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여자와 그 곁을 지키는 남자가 공원에서 대화를 나눈다. 6·25전쟁, 청계천 봉제공장, 베트남전 파병, 근로자 중동 파견,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역사가 이들의 삶에 중첩된다. 서울 혜화동 게릴라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 이야기다.

배우 이연규(50·사진)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편린을 더듬으며 시대의 비극을 넘나드는 주인공 미순 역을 절절하게 표현해낸다. 지난해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은 그를 서울 혜화동 연습실에서 만났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작품이 새롭게 느껴져요. 작년에는 치매에 걸린 미순의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그 자체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감정선을 더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는 연극 ‘그을린 사랑’ ‘대학살의 신’ ‘착한 사람 조양규’ 등에 출연한 25년차 배우다. 고려대 재학 시절 우연히 친구를 따라 들어간 극예술연구회에서 연극에 발을 처음 들였다. 동아리 선배인 손숙의 소개로 윤호진 연출가가 대표로 있던 극단 실험극장에 들어가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

오래 연극을 했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의 쉬는 시간이 긴 편이었다. 그는 지난해 동아연극상 수상에 대해 “지난 시간이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고 어떤 확신을 주는 것 같아 참 좋았다”며 “끼나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지금까지 온 것은 미련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5년째 항암 치료를 받으며 투병생활을 하고 있지만 무대를 떠나지 않는 이유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상대 배우인 이대연 선배나 스태프에 폐를 끼칠 때도 있는데 그래도 떠날 수가 없어요. 집에 있으면 환자지만 무대에 서면 배우가 되니까요. 제게 연기는 삶을 지속해나가는 방식이자 행복인 것 같습니다.”

그가 극 중 미순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남편의 대사 중에 ‘기다린다는 걸 잊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신이 나를 기다릴 수 있었겠소. 돌아가야 한다는 걸 잊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당신한테 돌아올 수 있었겠소’라는 대사가 있어요. 역설적이죠.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드니까, 그걸 견디려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야 한다는 거죠. 그 시절 우리 어머니 세대가 느꼈을 감정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객석까지 가 닿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0월4일까지.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