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욕 먹는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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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부동' 권하는 공직사회…거꾸로 가는 국회와 정부
"정권 바뀌면 또 달라질 텐데 …"
규제 개혁은 숫자 맞추기 급급
"자부심은커녕 비참할 때 많다"
비리집단 매도에 사기는 바닥
세종시 이전 후 현장과도 괴리
"정권 바뀌면 또 달라질 텐데 …"
규제 개혁은 숫자 맞추기 급급
"자부심은커녕 비참할 때 많다"
비리집단 매도에 사기는 바닥
세종시 이전 후 현장과도 괴리
올해 초 서울 시내 한 구청 교통관리팀장으로 발령받은 L사무관에게 첫날부터 주민 10여명이 몰려왔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마을버스 정류장을 설치해달라는 민원이었는데, 5년째 해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L사무관이 내용을 검토해 보니 구청 지침에도 위배되지 않았고, 교통 흐름에도 지장이 없어 정류장을 설치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왜 허가가 나지 않았을까. 이유를 알고 보니 기가 막혔다. 5년 전 교통팀장이 “민원을 하나씩 들어주다 보면 끝이 없다”며 거절한 게 이유였다. 그 뒤로 2년마다 팀장이 바뀌었지만 아무도 꿈쩍하지 않았다.
규제개혁도 ‘지시받은 것만’
서울시 모 구청 교통관리팀장 L사무관 “중앙에서 아무리 규제개혁 외쳐도 지자체에선 절박하게 느끼지 않는다”
정부부처 K국장 “규제 개혁도 숫자만 줄이면 된다는 식, 국민들이 체감할 만한 규제 개혁은 없다”
L사무관은 즉시 허가를 내주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고 한다. L사무관은 “허가를 내주면 자칫 직장 선배인 전임 팀장들의 잘못을 입증하는 꼴이 된다”며 “구청 내에서 왕따가 되는 걸 각오해야 함은 물론 향후 인사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할 수 없이 L사무관은 민원인들에게 시의원과 구의원을 찾아가서 압력을 넣으라고 귀띔했다. 구의원에게 민원을 넣자마자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허가가 났다.
L사무관은 “중앙정부에서 아무리 규제개혁을 외쳐도 실제로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장에선 매일같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며 “규제개혁에 대한 중앙정부의 절박감이 지방행정에선 먹히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무원은 사소한 것이라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규제개혁을 아무리 외쳐도 실제 생활에서 체감도가 낮은 이유는 뭘까. 한국경제신문은 중앙부처 공무원 14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들은 “규제개선이 공급자 중심의 목표(숫자 줄이기)에 치우치다 보니 실제 국민들에게 필요한 규제개혁이 아닌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지적했다. 한 경제부처 고위 공무원(2급) K씨는 “규제완화도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국민들을 위해서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며 “현실적으로 공무원들이 움직여야 하는 생활규제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일을 안 하는 게 최선
세종시 경제부처 P국장 “정권 바뀔 때마다 공직사회를 잡으니 그저 아무 일도 안하는 게 최선”
행정부 6급 직원 “무슨 일만 생기면 공무원 탓을 하니 공무원이라는 게 비참할 때가 많다”
서울시의 한 구청 공보팀장(6급)은 “정부가 규제개혁을 아무리 강조해도 국민이 실제 생활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지적에 공감한다”며 “위(중앙정부)에서 뭐라고 해도 아래(지방자치단체)에선 규제를 절대 풀어줄 수 없는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 인·허가 분야 지방 공무원들 사이에는 ‘한 번 뚫리면 전부 뚫린다’는 말이 있다”며 “규제를 풀어주면 꼭 특혜 시비가 일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러다 말겠지’라는 인식이 공무원들 사이에 팽배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부처 P국장은 “정권이 바뀌면 규제개혁의 초점이 또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최선이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공무원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규제개혁이든 공직사회 혁신이든 공무원에 대한 다양한 개혁방안이 나왔지만 매번 숫자 보여주기에 급급했다”며 “공직사회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이 뭔지에 대해 공감하는 공무원이 거의 없다”고 했다.
세종시 이전으로 사태 악화
세종시 경제부처 C과장 “세종시 이전 뒤 공무원들 현실감각·사기 더 떨어졌다”
‘왜 걸핏하면 공무원 탓만 하느냐’는 불만도 적지 않다. 조금만 잘못돼도 공무원 탓을 하고, 비리 집단으로 매도하고, 민간 진출을 막으니 자긍심도 떨어지고 의욕도 약해진다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한 6급 공무원은 “솔직히 15년 전 공직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박봉에 매일 욕만 먹으니 이제는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며 “내가 공무원이라는 게 비참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경제부처 공무원들 가운데는 세종시 이전이 공직사회의 사기 저하, 의욕 상실, 현실감 괴리 등 부정적인 효과를 증폭시킬 것으로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설문 응답자 147명 중 가장 많은 42명(28.6%)이 공직사회의 일하는 분위기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세종시 이전’을 지적했다. 관피아 문제(24.4%), 공무원연금개혁(20.4%)보다 세종시 이전을 더 우려했다.
한 경제부처의 C국장은 “세종시로 내려간 공무원들이 현장과는 담을 쌓고 국회와 청와대만 오가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며 “이런 환경에서 공무원들이 어떻게 현실을 반영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임원기/강경민/김주완 기자 wonkis@hankyung.com
규제개혁도 ‘지시받은 것만’
서울시 모 구청 교통관리팀장 L사무관 “중앙에서 아무리 규제개혁 외쳐도 지자체에선 절박하게 느끼지 않는다”
정부부처 K국장 “규제 개혁도 숫자만 줄이면 된다는 식, 국민들이 체감할 만한 규제 개혁은 없다”
L사무관은 즉시 허가를 내주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고 한다. L사무관은 “허가를 내주면 자칫 직장 선배인 전임 팀장들의 잘못을 입증하는 꼴이 된다”며 “구청 내에서 왕따가 되는 걸 각오해야 함은 물론 향후 인사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할 수 없이 L사무관은 민원인들에게 시의원과 구의원을 찾아가서 압력을 넣으라고 귀띔했다. 구의원에게 민원을 넣자마자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허가가 났다.
L사무관은 “중앙정부에서 아무리 규제개혁을 외쳐도 실제로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장에선 매일같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며 “규제개혁에 대한 중앙정부의 절박감이 지방행정에선 먹히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무원은 사소한 것이라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규제개혁을 아무리 외쳐도 실제 생활에서 체감도가 낮은 이유는 뭘까. 한국경제신문은 중앙부처 공무원 14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들은 “규제개선이 공급자 중심의 목표(숫자 줄이기)에 치우치다 보니 실제 국민들에게 필요한 규제개혁이 아닌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지적했다. 한 경제부처 고위 공무원(2급) K씨는 “규제완화도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국민들을 위해서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며 “현실적으로 공무원들이 움직여야 하는 생활규제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일을 안 하는 게 최선
세종시 경제부처 P국장 “정권 바뀔 때마다 공직사회를 잡으니 그저 아무 일도 안하는 게 최선”
행정부 6급 직원 “무슨 일만 생기면 공무원 탓을 하니 공무원이라는 게 비참할 때가 많다”
서울시의 한 구청 공보팀장(6급)은 “정부가 규제개혁을 아무리 강조해도 국민이 실제 생활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지적에 공감한다”며 “위(중앙정부)에서 뭐라고 해도 아래(지방자치단체)에선 규제를 절대 풀어줄 수 없는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 인·허가 분야 지방 공무원들 사이에는 ‘한 번 뚫리면 전부 뚫린다’는 말이 있다”며 “규제를 풀어주면 꼭 특혜 시비가 일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러다 말겠지’라는 인식이 공무원들 사이에 팽배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부처 P국장은 “정권이 바뀌면 규제개혁의 초점이 또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최선이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공무원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규제개혁이든 공직사회 혁신이든 공무원에 대한 다양한 개혁방안이 나왔지만 매번 숫자 보여주기에 급급했다”며 “공직사회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이 뭔지에 대해 공감하는 공무원이 거의 없다”고 했다.
세종시 이전으로 사태 악화
세종시 경제부처 C과장 “세종시 이전 뒤 공무원들 현실감각·사기 더 떨어졌다”
‘왜 걸핏하면 공무원 탓만 하느냐’는 불만도 적지 않다. 조금만 잘못돼도 공무원 탓을 하고, 비리 집단으로 매도하고, 민간 진출을 막으니 자긍심도 떨어지고 의욕도 약해진다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한 6급 공무원은 “솔직히 15년 전 공직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박봉에 매일 욕만 먹으니 이제는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며 “내가 공무원이라는 게 비참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경제부처 공무원들 가운데는 세종시 이전이 공직사회의 사기 저하, 의욕 상실, 현실감 괴리 등 부정적인 효과를 증폭시킬 것으로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설문 응답자 147명 중 가장 많은 42명(28.6%)이 공직사회의 일하는 분위기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세종시 이전’을 지적했다. 관피아 문제(24.4%), 공무원연금개혁(20.4%)보다 세종시 이전을 더 우려했다.
한 경제부처의 C국장은 “세종시로 내려간 공무원들이 현장과는 담을 쌓고 국회와 청와대만 오가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며 “이런 환경에서 공무원들이 어떻게 현실을 반영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임원기/강경민/김주완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