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올해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1795년(을묘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한 지 2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수원화성박물관 등에서 특별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지요. 1795년 당시, 윤2월 2일부터 8일 동안 치러진 이 행차를 찬찬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 두 행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바로 사도 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합니다. 둘째, 그 직후 정조는 자신이 만든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군사훈련을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주요 신하들과 직접 참관합니다.

조선 왕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삶을 산 정조

당시 이 행렬에 참가한 인원만 1779명, 말도 779필이나 됩니다. 그 규모가 엄청나 한강을 건널 때는 배가 아니라 아예 수많은 배를 엮어 만든 배다리를 사용합니다. 아, 참고로 그 배다리를 제작하는 데 실학자이자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이 적극 참여하였지요. 자, 이렇게 대규모 행렬이 먼저 간 곳은 영조의 노여움으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입니다. 그리고 왕권 강화의 필수적 요소인 친위부대의 군사훈련을 참관한 것이지요. 사실 어머니 환갑잔치보다 이 두 가지가 먼저 있었다는 점에서, 결국 사도 세자의 죽음을 지지했던 세력 또는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신하들은 매우 불편한 자리이거나 왕의 숨은 뜻을 헤아려 보기 위해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정조, 그는 1776년 왕위에 올라 24년 여 동안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실시하며 조선 후기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끈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1800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매 순간이 드라마틱했습니다. 아버지 사도 세자가 모반을 꾀했든, 정신병을 앓고 있었든 그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해도 결국 사도 세자를 반대하고 그의 죽음을 지지했던 명백한 정치 세력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정조는 차마 자신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이 세력을 확실히 누르며 개혁 정치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정조는 조선 전기 최고의 군주 세종을 자신의 롤모델로 정합니다. 백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 그리고 이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고 정치부터 경제, 사회, 예술, 과학까지 다방면의 성과를 남기게 됩니다.

강력한 탕평책과 규장각 활성화한 정조

대전통편
대전통편
정조는 자신을 노린 외척과 환관을 제거하였으며 반대로 기존에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을 기용합니다. 그 가운데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가 있지요. 한편 북학파로 잘 알려진 박제가 같은 서얼 출신도 그 능력이 출중하면 기용하였지요. 방식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으로 인재를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창덕궁 북쪽에 새 규장각 건물을 짓고 왕립도서관으로 활용하며 검서관이라 하여 서적을 보관하고 필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주로 서얼 중에서 뽑았습니다. 박제가 외에도 서이수, 이덕무, 유득공 등이 그들입니다. 모두 오늘날 실학자라 통칭하는 인재들이지요. 또한 이 규장각에서 초계문신제라고 하여 정조가 직접 당색이나 문벌에 상관없이 인재를 재교육하여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시전 상인들의 특권이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으며 『대전통편』과 같은 법전을 지어 국가의 기틀을 다시 잡았습니다. 문학에서는 ‘문체 반정’이라고 하여 중국 고대의 정연한 문체를 기준으로, 당시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의 새로운 문체를 다잡으려고도 하였습니다. 문화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이기도 하지요.

이 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앞서 언급한 장용영입니다. 1793년에 정조는 국왕 호위 전담부대를 신설합니다.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으로 구성하여 친위부대를 별도로 만든 것입니다. 이미 규장각 검서관 출신의 박제가와 당대 최고의 무사라는 백동수가 힘을 모아 만든 무술교본인 『무예도보통지』가 나왔으며, 이를 장용영이 익히며 군사훈련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사에서 유럽의 루이 14세 등 절대왕정 시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은 상비군이었습니다. 정조의 장용영도 왕권 강화를 통해 자신의 반대 세력까지 확실하게 누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세상 떠난 뒤 정조 정책이 대부분 사라져

[한국사 공부]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1800년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죽음도 매우 의외의 것이고 드라마틱했지요. 그 해 정조는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미 그 준비를 마친 상황으로 볼 수 있지요. 세상의 의리란 것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며 재상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것은 기존의 주류 세력인 노론이 아니라 비주류 세력인 남인 중심의 정국 구상을 한 것은 아니냐고 역사가들은 추측합니다. 그런데 이 말 이후 한 달 뒤, 등에 난 종기 때문에 그만 죽음을 맞게 됩니다. 여기서 이른바 최근까지도 회자된 ‘정조 독살설’이 떠오르게 됩니다. 최근 정조의 어찰(편지)이 발견되고 그 내용이 반대 세력과도 사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드러나 정조가 반대편에 의해 독살된 것은 아니라는 설에 무게가 더욱 실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정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대파에 의해 무너진 것은 아니냐는 소수의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정조 사후 나타난 조선의 정치 상황입니다. 정조의 대부분 정책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게 되지요.

정조 사후 1년 뒤, 곧 신유박해라 하여 남인 세력이 숙청당하고 2년 뒤에는 장용영이 해체됩니다. 규장각의 기능도 순수 왕실 도서관으로 축소되지요. 그리고 조선의 19세기는 이른바 세도 정치라는, 특정 가문에 의해 정치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으로 빨려들어갑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