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인근 통나무집서 하룻밤…모닥불 소리 들으며 심신 '힐링'
수십개 호수 품은 콜리 공원…침엽수림 따라 가을정취 '흠뻑'
영화 '아바타' 의 그 곳…플리트비체 공원엔 무지개빛이 흐른다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빈은 음악과 함께 걷는 도시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공원…호수 물빛 시시각각 달라져
핀란드 헬싱키에서 자동차로 다섯 시간을 달렸다. 하늘의 별들이 대지로 내려앉아 호수가 된 듯하다. 수백 개의 수면 위로 가을이 일렁이는 풍경이 선명해졌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목적지는 핀란드 동남쪽 지역인 북 카렐리아의 하니니에미다. 핀란드어로 카리알라라고 알려진 이곳은 북유럽의 넓은 지역에 걸쳐 살던 카렐리아인들의 땅이었다. 핀란드, 러시아, 스웨덴의 영토였다가 지금은 러시아의 카렐리아공화국, 레닌그라드주, 핀란드의 남카렐리아와 북카렐리아로 나뉘었다. 파란만장했던 역사는 아랑곳없이 이곳의 풍경은 고요를 넘어 적요하다.
숙소는 북카렐리아의 주도인 요엔수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비니야르미 호수 인근에 자리한 통나무집 ‘사리란(saarilan)’이다. 넓은 농장에 주인 부부가 기거하는 벽돌집, 헛간, 다섯 채의 통나무집이 듬성듬성 자리했다. 개, 닭, 염소, 토끼가 살고 있는 정다운 마당이 있고 주인집 굴뚝에선 장작을 태운 연기가 솟아올랐다. 호수, 나무, 흙, 낙엽, 연기와 가축 냄새가 뒤섞여 있다. 어딘지 어린 시절 방학 때 머물던 할머니의 시골집 공기를 그대로 닮았다. 어린아이가 행복의 찰나를 그린 풍경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실내로 들어가니 두 개의 작은 방, 정갈한 부엌,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페치카, 핀란드식 사우나가 있다. 나무와 불이 전하는 온기와 고소한 냄새에 어질러진 마음이 차근히 내려앉는다. 영영 머물러도 마냥 좋을 것 같은 아늑함….
방에 있는데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따뜻한 마음씨가 얼굴에 고스란히 밴 주인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광주리라고 불러도 좋을 납작한 바구니에 맛깔스러운 음식을 가득 담아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청어 절임, 인근에서 난 야생 베리로 만든 파이, 따뜻한 빵과 수프, 신선한 채소 등이 저녁 식탁을 수놓았다. 맛있는 음식을 두고, 대화가 이어지고 웃음이 만발했다. 장작의 불빛과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는 동안 따뜻한 가을밤이 깊어 갔다.
수십 개 호수가 둘러싼 콜리 국립공원
새벽닭 울음과 숲의 새소리에 잠이 깨 밖으로 나갔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호수 옆 숲은 사람의 마음을 지그시 들여다보고 따뜻하게 다독이는 듯했다.
사리란 인근 하비아네시 근처에 있는 발라모 수도원은 2차 세계대전 후 재건된 동방정교회 수도원이다. 사리란의 숲만큼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곳이다. 때마침 미사 시간이라 성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성당 안은 경건하고 엄숙한 기운이 가득했다. 처음 접하는 동방정교회의 미사라 그런지 좀 긴장됐다. 잠시 후 낮고 무거운 음으로 부르는 성가와 사제의 성경 강독, 사람들의 나지막한 기도 소리에 이내 마음이 놓이고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성화, 길고 가는 수십 개의 촛불에 둘러싸인 십자가,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표정, 창밖으로 펼쳐진 가을 호수 풍경은 누구에게나 안식을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도원 내에는 단기 체류자를 위한 숙소를 비롯해 핀란드 유일의 종교 서적 도서관, 와이너리, 전시장, 카페, 기념품숍이 있다. 성화를 그리고, 간단한 공예품을 제작하는 등의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와이너리와 인근의 농장 일을 돕거나, 밀랍으로 초를 만드는 등의 자원봉사를 하면서 머무는 체류자도 많다.
수도원을 나와 카리알라의 아름다운 가을 정취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사리란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자리한 콜리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국립공원 내 우노콜리, 아카콜리, 피하 콜리라는 바위산을 수십 개의 호수가 둘러싸고 있다. 시린 아침의 안개 낀 풍경은 아득했다. 붉고 노란 나뭇잎은 짙은 안개의 틈을 비집고 제 빛을 반짝이려 애쓰는 듯했다. 하늘을 찌를 기세로 뾰족하게 난 침엽수들은 안개 덕에 약간은 둥글어 보였다. 캠핑장에 모닥불을 피우고 따뜻한 커피와 머핀을 구워 먹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함께한 숲지기는 국립공원에 관한 이야기, 핀란드 사람들이 자연을 사유하는 방식 등을 들려줬다.
얼마쯤 지났을까. 활활 타던 모닥불 속 장작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숨을 죽였다. 가만히 불을 바라보니 머릿속 상념이 모조리 사라지고 멍해졌다. 빈자리에는 핀란드의 가을이 들어설 차례다. 해발 247m의 우노콜리 정상에 올랐다. 숲지기는 이곳에 앉아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자고 했다. 안개가 걷히면 수십 개의 호수에 보석처럼 박힌 1200여개의 작은 섬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기대했던 마법 같은 순간은 끝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콜리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가을은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여전히 가끔씩 유혹한다. 기대했던 마법의 순간을 만나러 다시 오라고. 가을 감성을 자극하는 오스트리아 빈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1년쯤 오스트리아의 빈에 살아보는 것이다. 한 계절만 택하라면 단연 가을에 머물고 싶다. 중세 시대 가장 부유했던 도시인 만큼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 모두 풍성하다. 결실의 계절 가을과 이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빈의 가을은 감성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말러를 비롯한 수많은 음악가의 도시는 지금도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하다. 세기의 화가 클림트와 에곤 실레, 코코슈카의 그림과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오토 바그너, 괴짜이자 천재인 예술가 훈데르트바서의 건축물도 도시를 장식한다. 비트겐슈타인과 프로이트가 즐겨 다니던 카페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우아한 모습으로 성업 중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볼거리가 풍성하다. 빈은 중세 유럽을 좌지우지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다. 여제(女帝)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혼정책을 통해 어지러운 주변 정세를 안정시켰고 부강해졌다. 그의 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프랑스 루이 16세에게 시집간 마리 앙투아네트다. 일부에서는 그녀가 원래 살던 방식대로 살았을 뿐인데 프랑스의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그만큼 당시의 오스트리아가 문화·예술·정치·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자석에 철이 붙듯, 막강한 권력의 합스부르크 왕가로 유럽의 온갖 진귀한 것들이 모여들었다. 집결된 모든 것은 빈의 궁전이나 박물관에 새로이 터를 잡았다.
걷기 좋은 가을에 빈이 다른 도시보다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대부분의 명소가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린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 양식 건축물인 슈테판 성당을 중심으로 중세 유럽의 중심 번화가 케른트너 거리,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 레오폴드 뮤지엄, 자연사 박물관, 미술사 박물관, 합스부르크 왕족이 기거했던 호프부르크 왕궁과 벨베데레 궁전까지 대부분 30분에서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있다. 걷는 도중 우연히 미술사·건축사적으로 의미 있는 건물들을 만나도 놀라지 말 것. 빈에서는 그저 흔한 일상이다. 신비로운 물색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유럽의 중앙에 있는 아름답고 거대한 원시림’으로 불린다. 가을이면 영화 ‘아바타’의 배경지인 숲이 색색의 가을빛으로 물든 듯한 절경이 펼쳐진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3만㏊가 넘는 초록 숲 사이로 계단식으로 배치된 16개의 호수가 90개의 폭포로 이어지는 자연의 흐름을 보여주는 곳이다. 공원을 둘러볼 수 있는 코스는 여러 갈래다. 플리트비체의 신비로운 모습을 속속들이 보고 싶다면 남쪽의 알프스에서 북해로 흐르는 지류를 따라가자. 코스는 공원 입구에서 꼭대기까지 트레일러를 타고 올라가는 것부터 시작된다. 걷는 동안 색색 옷을 입은 광활한 자연이 밀려오고 흘러간다. 바람에 실려 온 청량한 공기가 콧속으로 사정없이 들이칠 때면 호흡마다 탄산이 터지는 듯한 상쾌함을 즐길 수 있다.
꼭대기에서 시작되는 내리막길은 평탄하고 가파른 모습으로 모양새를 바꾸며 이어진다. 노랗고 붉은 가을빛도 아름답지만, 유심히 봐야 할 것은 호수의 물빛이다. 카르스트 지대에 형성된 호수의 물속에는 다량의 탄산칼슘이 지속적으로 석회 침전물을 생성한다. 이것이 청명한 물빛의 일등 공신이다. 물이 함유한 미네랄과 유기체의 함량에 따라 하늘빛, 에메랄드빛, 옥빛, 푸른빛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물빛에 취해 크고 작은 폭포를 지나고, 영험한 기운이 가득한 동굴을 지나며 걷다 보면 어느덧 상부와 하부 호수의 경계에 이른다. 이곳에서 보트를 타고 가장 넓은 호수인 코즈악을 건너 소풍을 즐기고 돌아오면 다섯 시간 여정의 코스가 마무리된다.
플리트비체는 미지의 신비한 세계다. 50여종의 포유류와 160종 이상의 조류, 희귀식물로 분류된 1200종의 식물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다른 차원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루 온종일 걸어도 이곳의 1%만 볼 수 있다는 가이드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특히 10월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초록빛과 가을색이 공존해 더욱 아름답다. 영롱한 호수의 수면 위로 보이는 대자연의 모습은 모네의 그림을 보는 듯이 곱다.
"유심히 봐야 할 것은 호수의 물빛이다. 물이 함유한 미네랄과 유기체의 함량에 따라 하늘빛, 에메랄드빛, 옥빛, 푸른빛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여행 수첩
헬싱키에서 카렐리아 지방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북카렐리아 지역의 주도인 요엔수까지 비행기, 철도를 이용해 이동할 수도 있다. 사리란(saarila.com), 발라모수도원(valamo.fi), 콜리 국립공원(koli.fi)은 각각의 홈페이지를 통해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np-plitvicka-jezera.hr)은 총 10개의 코스를 여행객에게 안내하고 있다. 성수기는 4~6월, 9~10월이며 요금도 비수기의 두 배다.
문유선 여행작가 hellomygrap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