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식단 바꾼 김재철의 참치캔…없던 시장 만든 기업가 정신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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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 보고서
"끊임없는 도전…시장의 변화 불러와"
"끊임없는 도전…시장의 변화 불러와"
‘참치 김치찌개, 참치 김밥, 참치 샌드위치….’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1982년 한국에 참치캔을 소개하면서 우리 밥상에 새롭게 등장한 음식들이다. 자유경제원은 ‘동원 김재철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란 보고서를 내고 “원양어업 업체였던 동원그룹이 참치캔 가공업에 뛰어들면서 한국 가정의 식단은 대변환을 맞았다. 기업가 정신이 사람들의 삶의 질을 크게 바꾼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끊임없는 도전의 기업가
김 회장이 수산업에 관심을 두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서울대 농과대에 장학생으로 선발된 김 회장에게 고교 은사가 “한국이 발전하려면 자원의 보고인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며 “너 같은 우수한 젊은이가 바다에 미래를 걸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진심 어린 충고에 마음을 바꾼 김 회장은 서울대 입학 대신 국립수산대(부경대 전신) 어로과에 진학했다. 70여년간 이어지는 바다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김 회장은 안주하지 않았다. 해무청, 수산시험장 등 안정된 직장을 뒤로하고 원양어선을 선택했다.
원양어선 업체에선 ‘배 타기엔 너무 뛰어난 인재라 얼마 못 가 도망갈 것’이라고 채용하지 않으려 했다. 김 회장은 ‘항해 중 사고를 당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서약하면서까지 억지로 배에 올랐다. 바다에서 사업을 하려면 현장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지남 2호 선장, 고려원양의 최연소 이사 등을 거친 김 회장은 1969년 동원산업을 세워 수산기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동원산업을 덮쳤다. 1973년 배럴당 2달러였던 유가는 1년 만에 11달러로 치솟았다. 어로원가의 40% 이상을 차지하던 유류비의 급상승으로 원양업체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고기잡이에 나서는 기간을 늘리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 영하 50도 이하로 참치를 냉동시킬 수 있는 ‘독항 어업’을 도입했다. 참치를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자 유통망이 확장됐다. 참치 가격이 높은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
1979년 2차 석유파동 때는 헬리콥터를 탑재한 참치어선(선망어법)을 도입해 어장에 투입했다. 미국 업체들도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던 첨단 어법이었다. 김 회장은 직접 파푸아뉴기니 해역에서 선망어법에 도전했다.
보고서를 발표한 김홍균 서강대 교수(경제학과)는 “김 회장의 승선은 거래처들이 동원의 사업 의지를 믿는 계기가 됐다”며 “문제를 직접 풀겠다는 경영자의 의지가 사업 성공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참치캔으로 식단 ‘혁신’
원양바다를 정복한 김 회장은 국내 식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참치캔을 개발해 식품가공업에 진출하기로 한 것. 1982년 국내 최초의 참치캔이 동원의 이름을 달고 시장에 출시됐다. 초기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사람들은 참치에 대해 알지 못했다. 참치캔은 1인당 국민소득 2000달러 이상인 나라에서만 팔리는 선진국형 상품이어서다.
김 회장은 시장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김 회장이 기획해 1984년 추석 명절 때 내놓은 참치캔 선물세트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30만개 넘게 팔려 나갔다. 고급스런 음식이란 이미지를 심기 위해 TV 광고, 시식회 등 과감한 마케팅을 펼쳤기 때문이다.
2008년엔 미국 최대의 참치캔 회사인 스타키스트(Starkist)를 인수해 글로벌 정복에 나섰다. 지난해 9월로 동원의 참치캔 판매량은 50억개를 넘어섰다. 김 교수는 “참치캔 덕분에 한국인은 낮은 가격으로 높은 품질의 수산물을 맘껏 즐길 수 있게 됐다”며 “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동원그룹의 성장뿐 아니라 한국인의 식단 혁신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1982년 한국에 참치캔을 소개하면서 우리 밥상에 새롭게 등장한 음식들이다. 자유경제원은 ‘동원 김재철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란 보고서를 내고 “원양어업 업체였던 동원그룹이 참치캔 가공업에 뛰어들면서 한국 가정의 식단은 대변환을 맞았다. 기업가 정신이 사람들의 삶의 질을 크게 바꾼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끊임없는 도전의 기업가
김 회장이 수산업에 관심을 두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서울대 농과대에 장학생으로 선발된 김 회장에게 고교 은사가 “한국이 발전하려면 자원의 보고인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며 “너 같은 우수한 젊은이가 바다에 미래를 걸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진심 어린 충고에 마음을 바꾼 김 회장은 서울대 입학 대신 국립수산대(부경대 전신) 어로과에 진학했다. 70여년간 이어지는 바다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김 회장은 안주하지 않았다. 해무청, 수산시험장 등 안정된 직장을 뒤로하고 원양어선을 선택했다.
원양어선 업체에선 ‘배 타기엔 너무 뛰어난 인재라 얼마 못 가 도망갈 것’이라고 채용하지 않으려 했다. 김 회장은 ‘항해 중 사고를 당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서약하면서까지 억지로 배에 올랐다. 바다에서 사업을 하려면 현장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지남 2호 선장, 고려원양의 최연소 이사 등을 거친 김 회장은 1969년 동원산업을 세워 수산기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동원산업을 덮쳤다. 1973년 배럴당 2달러였던 유가는 1년 만에 11달러로 치솟았다. 어로원가의 40% 이상을 차지하던 유류비의 급상승으로 원양업체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고기잡이에 나서는 기간을 늘리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 영하 50도 이하로 참치를 냉동시킬 수 있는 ‘독항 어업’을 도입했다. 참치를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자 유통망이 확장됐다. 참치 가격이 높은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
1979년 2차 석유파동 때는 헬리콥터를 탑재한 참치어선(선망어법)을 도입해 어장에 투입했다. 미국 업체들도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던 첨단 어법이었다. 김 회장은 직접 파푸아뉴기니 해역에서 선망어법에 도전했다.
보고서를 발표한 김홍균 서강대 교수(경제학과)는 “김 회장의 승선은 거래처들이 동원의 사업 의지를 믿는 계기가 됐다”며 “문제를 직접 풀겠다는 경영자의 의지가 사업 성공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참치캔으로 식단 ‘혁신’
원양바다를 정복한 김 회장은 국내 식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참치캔을 개발해 식품가공업에 진출하기로 한 것. 1982년 국내 최초의 참치캔이 동원의 이름을 달고 시장에 출시됐다. 초기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사람들은 참치에 대해 알지 못했다. 참치캔은 1인당 국민소득 2000달러 이상인 나라에서만 팔리는 선진국형 상품이어서다.
김 회장은 시장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김 회장이 기획해 1984년 추석 명절 때 내놓은 참치캔 선물세트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30만개 넘게 팔려 나갔다. 고급스런 음식이란 이미지를 심기 위해 TV 광고, 시식회 등 과감한 마케팅을 펼쳤기 때문이다.
2008년엔 미국 최대의 참치캔 회사인 스타키스트(Starkist)를 인수해 글로벌 정복에 나섰다. 지난해 9월로 동원의 참치캔 판매량은 50억개를 넘어섰다. 김 교수는 “참치캔 덕분에 한국인은 낮은 가격으로 높은 품질의 수산물을 맘껏 즐길 수 있게 됐다”며 “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동원그룹의 성장뿐 아니라 한국인의 식단 혁신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