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방영된 작품서 차용…시청자들 관심 높여 흥행몰이
최근 화제를 모으며 방영 중인 SBS 역사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는 2011년 인기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인 검객 무휼과 이방지가 등장한다. 전작에서 각각 세종대왕의 호위를 맡은 무관과 나이 많은 전설적인 검의 고수로 나온 이들은 고려 말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청년 시절 이야기를 풀어낸다. 무휼과 이방지란 인물만 놓고 보면 ‘육룡이 나르샤’는 ‘뿌리깊은 나무’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프리퀄(prequel)인 셈이다.
방송가에 이전 작품의 극 중 인물이나 배경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콘텐츠 제작붐이 일고 있다. ‘육룡이 나르샤’처럼 이전 드라마에서 창조한 캐릭터가 재등장하는가 하면 드라마의 배경과 인물 설정이 웹툰이나 예능프로그램 등 다른 장르로 확장되기도 한다.
케이블채널 tvN은 ‘응답하라 1997’(응칠), ‘응답하라 1994’(응사)에 이어 ‘응답하라 1988’(응팔)을 지난 6일부터 방영하고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주인공과 시대적 배경은 매번 바뀌지만 드라마 구성과 분위기, 포맷은 비슷하다. 이 시리즈는 극 중 인물이 겹치지 않지만 배우 성동일의 캐릭터를 공유한다. 시리즈마다 성동일은 주인공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응사’는 방영 당시인 2013년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응칠’ 등장인물을 아파트 이웃으로 함께 등장시켰다. 두 드라마에서 주인공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성동일이 1인2역으로 나와 각자의 자식 이야기로 환담을 나눈 장면이다.
2007년 첫 방송을 한 이후 올해 14번째 시즌 방송을 내보낸 tvN의 ‘막돼먹은 영애씨’(막영애)는 지난해부터 같은 방송시간대에 방영된 직전 드라마에 극중 주인공 ‘이영애’를 등장시켰다. 올해도 지난 8월 드라마 ‘신분을 숨겨라’ 최종회 막바지에 이영애가 깜짝 출연했다. 지난달 방영된 ‘막영애’ 최종회에는 차기작 ‘풍선껌’의 여주인공 정려원이 등장했다.
지난달 7일 방영을 시작한 SBS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은 국내 최초로 드라마 원작 웹툰을 만들었다. KT의 올레마켓웹툰에서 연재 중인 ‘마을-아치아라의 겨울’이다. 드라마 시점으로부터 1년 전에 주인공에게 일어난 일을 다룬다. 일종의 변형된 프리퀄이다. 올 6월 종영한 tvN ‘식샤를 합시다’는 ‘내 친구와 식샤를 합시다’란 예능 프로그램으로 재탄생했다.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은 윤두준과 서현진이 그대로 출연한다.
기존 작품의 인물과 설정을 이어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청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새 작품의 마케팅에 유리하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CJ E&M 관계자는 “기존 작품을 좋아한 시청자를 새 작품으로 고스란히 끌어올 수 있다”며 “신작의 주인공이 직전 드라마 최종회에 카메오로 등장하면 홍보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기존 콘텐츠를 새 작품의 자산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전 작품의 탄탄한 캐릭터나 설정을 재활용해 신작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이미 흥행이 검증된 배경을 다시 활용해 새 작품의 실패 가능성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는 한 콘텐츠에 나왔던 이야기 설정이나 인물을 다른 콘텐츠에서 끌어 쓰거나 활용한 성공 사례가 많다. 미국 마블사의 ‘마블 유니버스’가 대표적이다.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캡틴아메리카 등을 각자 단독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나오는가 하면, 지난 4월 개봉한 시리즈 두번째 이야기가 1040만 관객수를 기록한 ‘어벤져스’처럼 등장인물이 모두 모여서 이야기를 꾸미기도 한다.
드라마의 외전 격인 ‘스핀오프’ 드라마나 드라마 속 세계의 주변 이야기 등을 풀어내는 ‘웨비소드(웹+에피소드)’ 제작도 활발하다. 2000년 첫 방영을 한 미국의 수사드라마 ‘CSI’는 같은 설정으로 15년간 TV 시리즈 세 개를 더 만들었다. 지난 9월에는 사이버 범죄를 다루는 ‘CSI 사이버’가 2시즌 방영을 시작했다. 종종 각 시리즈의 등장인물이 함께 나와 공동 수사를 하며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 비디오 게임, 만화책 등으로도 만들어져 자체 콘텐츠 프랜차이즈를 구축했다. 시리즈가 가장 인기있었던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약 10억 달러(약 1조1440억원)의 수익을 냈다. 인기 드라마 외전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다. 지난 19일에는 팍스TV 공동대표인 데이나 월든이 히트 드라마 ‘엠파이어’의 인기 조연을 주인공으로 한 외전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도 최근 ‘이어지는 콘텐츠’ 제작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아직 단발성에 머물러 있다. 드라마를 이끌어갈 배우층이 좁아 섭외가 힘들고 작품당 배정되는 예산이 적은 게 가장 큰 이유다.
‘육룡이 나르샤’의 박상연 작가는 “인물이나 배경 설정이 이어지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지만 같은 배우를 연속으로 캐스팅하기 어려워 현실적으로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한 드라마 PD는 “쪽대본이 예사인 현재 제작 여건에서는 이어지는 내용의 드라마 제작을 미리 생각할 수 없다”며 “드라마가 성공한 뒤 외전을 제작하게 되면 새로 출연료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배로 드는 부담도 크다”고 말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