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 워싱턴기념탑, 트럼프 그리고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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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앞에 서 있는 워싱턴기념탑은 관광 명물이다. 한 해 100만명 이상이 찾는다. 높이 168m의 이 건축물은 상단과 하단의 색깔이 다르다. 상단 3분의 2의 색깔이 하단보다 진하다. 서로 다른 대리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경위는 이렇다. 민간 기념탑 설립위원회는 착공 7년 만인 1854년 자금난으로 공사를 중단해야 할 처지에 빠졌다. 이때 로마 교황청에서 자금과 물품 지원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 내 강한 ‘반(反)가톨릭 정서’가 이 같은 제안의 수용을 가로막았다. 공사는 25년간 중단됐고, 정부 지원으로 공사가 재개된 시점엔 다른 채석장의 돌을 사용했다. 기념탑을 함께 둘러본 한 미국 싱크탱크 관계자는 “기념탑의 단절된 색깔은 배타적 사회 분위기가 남긴 부끄러운 흔적”이라고 말했다.
위기 후 백인·중산층 상실감 커져
2001년 9·11테러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크게 변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년간 보여준 개방과 수용, 자신감은 사라지고 불안과 불신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미 공공종교연구소(PRRI)가 미국인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미래를 낙관한다는 답은 49%였다. 3년 전 54%에서 크게 떨어졌다. 사회 변화가 잘못됐다는 불만의 목소리는 46%에서 53%로 커졌다. 백인 중산층에서 이런 변화가 더 확연했다.
백인 중산층은 상실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미 프린스턴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내 백인 중년(40~50대) 사망률은 2000년 이후 미국 내 전 인종·연령층에서 유일하게 상승세를 보였다. 주요 원인은 자살과 알코올·약물 남용이었다. 일종의 ‘상실병’이다.
이들은 타인에 대한 ‘공격’에서 치유책을 찾고 있다. 대상은 멕시코인과 여성, 무슬림, 중국인 등 무작위다. 마침 도널드 트럼프라는 희대의 ‘엔터테이너’가 대통령 선거전에 나와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트럼프는 멕시코 이민자를 ‘성폭행범’ ‘범죄자’로, 중국인들을 미국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 비유한다. 트럼프의 인기는 막말 수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덩달아 높아진다.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다. 워싱턴포스트는 ‘조용한 다수(silent majority)’라는 팻말을 든 지지자들 사이엔 “(약간 거짓말해도) 트럼프니까 괜찮아”라는 인식이 있다고 보도했다.
관용과 배타 기로에 선 미국
이들은 변화가 불안하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같은 시장 개방정책도 달갑지 않다. 정부가 뭔가를 속이는 것 같고, 일본이나 다른 회원국에 뭔가를 더 빼앗길 것 같다. 트럼프에 이어 테드 크루즈나 칼리 피오리나 등 미 공화당 주요 주자들이 눈치 빠르게 TPP 반대 쪽으로 돌아선 이유다.
에이미 추아 미 예일대 법대 교수는 저서 《제국의 미래》에서 “2500년 인류 역사상 모든 초강대국은 관용과 개방을 유지할 때 번성했고, 이를 포기할 때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고 썼다. 미국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하다. 미국인들이 분노와 불안을 성숙하게 다스리지 못한다면 침체는 길어지고, 상처는 더 깊어질 것이다. 미국의 선택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 미국인들의 선택이 주목되는 이유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
경위는 이렇다. 민간 기념탑 설립위원회는 착공 7년 만인 1854년 자금난으로 공사를 중단해야 할 처지에 빠졌다. 이때 로마 교황청에서 자금과 물품 지원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 내 강한 ‘반(反)가톨릭 정서’가 이 같은 제안의 수용을 가로막았다. 공사는 25년간 중단됐고, 정부 지원으로 공사가 재개된 시점엔 다른 채석장의 돌을 사용했다. 기념탑을 함께 둘러본 한 미국 싱크탱크 관계자는 “기념탑의 단절된 색깔은 배타적 사회 분위기가 남긴 부끄러운 흔적”이라고 말했다.
위기 후 백인·중산층 상실감 커져
2001년 9·11테러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크게 변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년간 보여준 개방과 수용, 자신감은 사라지고 불안과 불신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미 공공종교연구소(PRRI)가 미국인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미래를 낙관한다는 답은 49%였다. 3년 전 54%에서 크게 떨어졌다. 사회 변화가 잘못됐다는 불만의 목소리는 46%에서 53%로 커졌다. 백인 중산층에서 이런 변화가 더 확연했다.
백인 중산층은 상실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미 프린스턴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내 백인 중년(40~50대) 사망률은 2000년 이후 미국 내 전 인종·연령층에서 유일하게 상승세를 보였다. 주요 원인은 자살과 알코올·약물 남용이었다. 일종의 ‘상실병’이다.
이들은 타인에 대한 ‘공격’에서 치유책을 찾고 있다. 대상은 멕시코인과 여성, 무슬림, 중국인 등 무작위다. 마침 도널드 트럼프라는 희대의 ‘엔터테이너’가 대통령 선거전에 나와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트럼프는 멕시코 이민자를 ‘성폭행범’ ‘범죄자’로, 중국인들을 미국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 비유한다. 트럼프의 인기는 막말 수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덩달아 높아진다.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다. 워싱턴포스트는 ‘조용한 다수(silent majority)’라는 팻말을 든 지지자들 사이엔 “(약간 거짓말해도) 트럼프니까 괜찮아”라는 인식이 있다고 보도했다.
관용과 배타 기로에 선 미국
이들은 변화가 불안하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같은 시장 개방정책도 달갑지 않다. 정부가 뭔가를 속이는 것 같고, 일본이나 다른 회원국에 뭔가를 더 빼앗길 것 같다. 트럼프에 이어 테드 크루즈나 칼리 피오리나 등 미 공화당 주요 주자들이 눈치 빠르게 TPP 반대 쪽으로 돌아선 이유다.
에이미 추아 미 예일대 법대 교수는 저서 《제국의 미래》에서 “2500년 인류 역사상 모든 초강대국은 관용과 개방을 유지할 때 번성했고, 이를 포기할 때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고 썼다. 미국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하다. 미국인들이 분노와 불안을 성숙하게 다스리지 못한다면 침체는 길어지고, 상처는 더 깊어질 것이다. 미국의 선택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 미국인들의 선택이 주목되는 이유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