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을 내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 어떡합니까.” 소규모 벤처기업을 운영하다 거래처 부도로 길거리에 나앉은 A씨의 사연은 딱하다.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었으나 연쇄도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성실납세자였던 그가 하루아침에 체납자가 돼버렸다. 그나마 공사판에서 재기를 꿈꾸는 그는 조금씩이라도 세금을 갚아나갈 생각이다.

하지만 고액 상습 체납자들의 행태는 전혀 다르다. 고의로 재산을 빼돌리고 오리발을 내민다. 세금 30억원을 내지 않고 버티던 B씨도 그랬다. 고급빌라에서 외제차를 굴리던 그는 세금 추징반이 들이닥치자 “돈이 있으면 왜 안 내겠느냐”며 딴청을 피웠다. 얼마 후 가사도우미가 손지갑을 갖고 나가는 것을 수상히 여겨 뒤쫓아가 확인했더니 그 속에서 1억3000만원어치 수표와 현금이 나왔다.

재산 은닉 수법도 갈수록 지능화하고 있다. 최근엔 가마솥 아궁이까지 동원됐다. 양도소득세 9억원가량을 체납한 사람이 전원주택 아궁이에 5만원권과 미화 100달러짜리 등 6억원 상당의 현금 다발을 감춰뒀다 들켰다. 부동산 판 돈 일부를 가방에 넣어 잿더미에 묻어놨다니, 그야말로 기상천외다.

또 다른 체납자는 집안 곳곳에 다이아몬드 반지와 자수정 금목걸이, 고가 미술품 등을 숨겼다가 발각됐다. ‘한푼 없는 알거지’ 집에서 고급 와인 1200병과 명품가방 30개가 나오기도 했다. 부가가치세 43억원을 체납한 골프장에서 현금 2억원이 나왔다. 유령 외국법인을 세워 호화주택을 사거나 허위근저당권으로 재산을 빼돌리는 건 낡은 축에 속한다.

엊그제 국세청이 단속을 강화하면서 5억원 이상 국세 1년 이상 체납자 2226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들의 체납 세금은 3조7832억원으로 1인당 17억원꼴이다. 올해 드러난 것만 이 정도다. 종전 체납액까지 합치면 7조8000억원을 넘는다.

악의적인 체납자들의 ‘꼴뚜기 짓’이 늘어나면 그만큼 성실 납세자들의 세 부담은 증가한다. 국세청이 무한추적반을 운영하면서 은닉재산 신고포상금 제도(국번 없이 126번)를 도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포상금은 최고 20억원이다. 올 1~9월에만 245건이 신고돼 40억9600만원을 징수한 대가로 4억7500만원이 지급됐다고 한다.

세금 도둑은 다른 곳에도 수두룩하다. 빙산의 아래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나랏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헛돈을 쓰는 일부 정치인이나 파렴치한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