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일본기업 혁신'의 상징 히타치 부활 이끈 가와무라 다카시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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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억엔 흑자 사업도 매각…통증 수반한 개혁이 히타치 부활 비결"
한계기업 줄줄이 정리…사회 인프라 사업에 역량 집중
6년간 30건의 M&A로 피인수 기업들의 '장래성' 수혈
기업 개혁은 '위에서 아래로' 불가피…CEO 의지 절대적
한계기업 줄줄이 정리…사회 인프라 사업에 역량 집중
6년간 30건의 M&A로 피인수 기업들의 '장래성' 수혈
기업 개혁은 '위에서 아래로' 불가피…CEO 의지 절대적
“성장전략의 실행과 동시에 통증이 따르는 구조조정이 꼭 필요합니다.”
가와무라 다카시(川村隆) 히타치제작소 고문은 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는 히타치 본사에서 한국경제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기업이 개혁하면서 이 중 하나만 실행하는 것은 한 손으로 박수를 치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현재의 히타치에 대해서는 “선수로 치면 아직 올림픽 예선을 통과할까 말까 한 수준”이라며 “영업이익률 10%대 안착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와무라 고문은 자신이 최고경영자(CEO)이자 회장으로 일한 5년간(2009~2014년)의 히타치 개혁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준비해온 그래프와 도표를 보여주면서 20분 가까이 열변을 토했다.
▷LG그룹이 히타치를 롤모델로 삼을 정도로, 한국에서도 히타치의 개혁에 관심이 많습니다.
“일본에서는 ‘성공적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국제 기준으로 보면 아직 부족합니다. 수익성 지표인 영업이익률이 최소 10%(현재 7%)는 돼야 합니다.”
▷2008 회계연도에 일본 제조업체를 통틀어 역대 최대 규모의 적자를 냈습니다.
“기존 사업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실적이 둔화할 것 같은 사업에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둬야 했습니다. 이 부분이 느슨했던 결과죠. 리먼브러더스 사태 같은 위기가 닥치니까 흑자와 적자의 경계에 있던 사업들이 일제히 나빠졌습니다.”
▷그래도 그 전까지 꾸준히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이익입니다. 매출만 느는 것은 사람으로 비교하면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 키만 크는 것입니다. 2007 회계연도에 매출(11조2000억엔)은 사상 최대였지만 2년째 적자였습니다. 순이익에 주목했더라면 위기에 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CEO로 복귀한 뒤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습니다.
“우선 제대로 이익이 나지 않는 기존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새로운 성장사업에서 이익이 나도 기존 사업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한국 기업들도 비슷할 것입니다. 버리지 못해 매달려 있는 사업을 과감히 정리해야 합니다. 연 6억5000만달러(약 600억엔)의 영업이익을 내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사업도 미래 주력 분야가 아니라고 보고 팔았습니다. 대신 첨단 정보기술(IT)을 결합한 전력, 철도 등 ‘사회 인프라 사업’을 성장전략으로 정해 회사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노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공장 폐쇄와 관련해서는 물론 반발이 있었습니다. 2009년 PDP공장 매각과 철수를 발표한 뒤 최종 마무리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미야자키현 PDP공장에서 일하는 직원 1100명 가운데 미야자키현에 남고 싶어한 직원은 인수 기업인 쇼와셀솔라(현재 솔라프런티어)로 보냈고, 히타치에 계속 있기를 원한 600명은 다른 공장으로 재배치했습니다. 한 명, 한 명 이직이나 전직하는 것을 보고는 직원들이 회사 방침을 수용해 공장 문을 닫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개혁의 원칙은 무엇이었습니까.
“성장전략의 실행과 통증이 불가피한 구조조정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조조정만 하면 다들 기가 죽어 회사에 활기가 사라집니다. 어느 하나만 하는 것은 한 손으로 박수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히타치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꼽는다면.
“우선 CEO인 저를 포함해 개혁파 경영진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이죠. 두 번째는 경영진을 관리·감독하는 존재, 바로 이사회입니다. 외부 시각에서 개혁을 감시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했습니다. 세 번째는 직원들의 의식 전환입니다.”
▷경영진의 역할을 첫 번째로 꼽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장전략은 CEO가 결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더구나 구조조정은 아래에서 위로 진행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죠. 히타치는 막대한 적자를 낸 시점이어서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이 비교적 쉬웠습니다.”
▷개혁의 필요성은 알지만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혁이 힘든 것은 그냥 기존대로 하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업 내 자기 조직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사람이 많아지면 그 기업은 망합니다. 요즘 세계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려고 하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과거와 다른 뭔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돈을 벌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2009년부터 30건 가까운 기업 인수합병(M&A)과 경영 통합이 있었습니다. M&A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실적도 봐야 하지만 그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고 ‘어떤 고객’을 상대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회사가 아니라 그 회사의 ‘장래성’을 산다고 해야 할까요. 히타치는 현지 법인이 M&A 의사결정을 직접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일본과 중국 기업 사이에서 ‘샌드위치 처지’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주요 기업은 인력이나 자본 면에서 기술력을 더욱 강화할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최신 기술에서는 좀 뒤처져 있습니다. 로봇이나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은 고도 기술의 응집체입니다. 보유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생산해 파는 것도 좋지만 이들 중 어느 한 분야에서는 최고가 될 때까지 연구개발을 계속해야 합니다.”
가와무라 다카시는…
가와무라 다카시 히타치 고문은 ‘위기의 히타치호(號)’를 구한 ‘최후의 남자(라스트 맨)’로 통한다. 회사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반영된 별명이다. 히타치에서 41년간 근무한 뒤 계열사 사장과 회장을 거쳐 고문으로 물러나 있다가 6년 만에 사업지주회사인 히타치의 최고경영자(CEO)로 전격 복귀했다. 신속한 구조조정과 과감한 사업 개편을 단행, 경영 복귀 2년 만에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히타치는 2010, 2011 회계연도 연속으로 사상 최대 순이익을 경신했다. 지난해 3월에는 ‘라스트 맨’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며 고문으로 물러났다. 올초 히타치 개혁 스토리를 담은 저서 《더 라스트 맨》을 발간했다.
△1939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생 △1962년 도쿄대 공학부 전기공학과 졸업 △1962년 히타치제작소 입사 △1992년 히타치공장장 △1999년 부사장 △2003년 히타치소프트웨어엔지니어링 대표 △2007년 히타치소프트웨어엔지니어링 고문 △2009년 히타치 사장 겸 회장 △2014년 고문
창사 105년 된 히타치제작소, 일본 'B2B 대표주자'…작년 매출 10조엔
회사를 창립한 지 105년이 된 히타치제작소는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 간 거래(B2B) 사업지주회사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기·전자 분야가 사업의 중심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손실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일본 제조업체 사상 최대 규모인 7873억엔(당시 환율 기준 약 10조2000억원)의 적자를 냈다. 2009년부터 디스플레이, TV, PC사업 등을 줄줄이 정리하고 전력, 정보통신, 철도사업에 집중하는 사회 인프라 기업으로 변신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2014 회계연도에는 매출 9조7749억엔, 순이익 2194억엔을 달성했다. 자회사가 996개, 종업원은 33만3100여명이다.
도쿄=서정환 특파원 ceoseo@hankyung.com
가와무라 다카시(川村隆) 히타치제작소 고문은 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는 히타치 본사에서 한국경제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기업이 개혁하면서 이 중 하나만 실행하는 것은 한 손으로 박수를 치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현재의 히타치에 대해서는 “선수로 치면 아직 올림픽 예선을 통과할까 말까 한 수준”이라며 “영업이익률 10%대 안착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와무라 고문은 자신이 최고경영자(CEO)이자 회장으로 일한 5년간(2009~2014년)의 히타치 개혁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준비해온 그래프와 도표를 보여주면서 20분 가까이 열변을 토했다.
▷LG그룹이 히타치를 롤모델로 삼을 정도로, 한국에서도 히타치의 개혁에 관심이 많습니다.
“일본에서는 ‘성공적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국제 기준으로 보면 아직 부족합니다. 수익성 지표인 영업이익률이 최소 10%(현재 7%)는 돼야 합니다.”
▷2008 회계연도에 일본 제조업체를 통틀어 역대 최대 규모의 적자를 냈습니다.
“기존 사업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실적이 둔화할 것 같은 사업에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둬야 했습니다. 이 부분이 느슨했던 결과죠. 리먼브러더스 사태 같은 위기가 닥치니까 흑자와 적자의 경계에 있던 사업들이 일제히 나빠졌습니다.”
▷그래도 그 전까지 꾸준히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이익입니다. 매출만 느는 것은 사람으로 비교하면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 키만 크는 것입니다. 2007 회계연도에 매출(11조2000억엔)은 사상 최대였지만 2년째 적자였습니다. 순이익에 주목했더라면 위기에 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CEO로 복귀한 뒤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습니다.
“우선 제대로 이익이 나지 않는 기존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새로운 성장사업에서 이익이 나도 기존 사업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한국 기업들도 비슷할 것입니다. 버리지 못해 매달려 있는 사업을 과감히 정리해야 합니다. 연 6억5000만달러(약 600억엔)의 영업이익을 내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사업도 미래 주력 분야가 아니라고 보고 팔았습니다. 대신 첨단 정보기술(IT)을 결합한 전력, 철도 등 ‘사회 인프라 사업’을 성장전략으로 정해 회사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노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공장 폐쇄와 관련해서는 물론 반발이 있었습니다. 2009년 PDP공장 매각과 철수를 발표한 뒤 최종 마무리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미야자키현 PDP공장에서 일하는 직원 1100명 가운데 미야자키현에 남고 싶어한 직원은 인수 기업인 쇼와셀솔라(현재 솔라프런티어)로 보냈고, 히타치에 계속 있기를 원한 600명은 다른 공장으로 재배치했습니다. 한 명, 한 명 이직이나 전직하는 것을 보고는 직원들이 회사 방침을 수용해 공장 문을 닫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개혁의 원칙은 무엇이었습니까.
“성장전략의 실행과 통증이 불가피한 구조조정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조조정만 하면 다들 기가 죽어 회사에 활기가 사라집니다. 어느 하나만 하는 것은 한 손으로 박수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히타치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꼽는다면.
“우선 CEO인 저를 포함해 개혁파 경영진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이죠. 두 번째는 경영진을 관리·감독하는 존재, 바로 이사회입니다. 외부 시각에서 개혁을 감시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했습니다. 세 번째는 직원들의 의식 전환입니다.”
▷경영진의 역할을 첫 번째로 꼽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장전략은 CEO가 결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더구나 구조조정은 아래에서 위로 진행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죠. 히타치는 막대한 적자를 낸 시점이어서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이 비교적 쉬웠습니다.”
▷개혁의 필요성은 알지만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혁이 힘든 것은 그냥 기존대로 하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업 내 자기 조직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사람이 많아지면 그 기업은 망합니다. 요즘 세계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려고 하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과거와 다른 뭔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돈을 벌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2009년부터 30건 가까운 기업 인수합병(M&A)과 경영 통합이 있었습니다. M&A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실적도 봐야 하지만 그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고 ‘어떤 고객’을 상대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회사가 아니라 그 회사의 ‘장래성’을 산다고 해야 할까요. 히타치는 현지 법인이 M&A 의사결정을 직접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일본과 중국 기업 사이에서 ‘샌드위치 처지’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주요 기업은 인력이나 자본 면에서 기술력을 더욱 강화할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최신 기술에서는 좀 뒤처져 있습니다. 로봇이나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은 고도 기술의 응집체입니다. 보유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생산해 파는 것도 좋지만 이들 중 어느 한 분야에서는 최고가 될 때까지 연구개발을 계속해야 합니다.”
가와무라 다카시는…
가와무라 다카시 히타치 고문은 ‘위기의 히타치호(號)’를 구한 ‘최후의 남자(라스트 맨)’로 통한다. 회사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반영된 별명이다. 히타치에서 41년간 근무한 뒤 계열사 사장과 회장을 거쳐 고문으로 물러나 있다가 6년 만에 사업지주회사인 히타치의 최고경영자(CEO)로 전격 복귀했다. 신속한 구조조정과 과감한 사업 개편을 단행, 경영 복귀 2년 만에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히타치는 2010, 2011 회계연도 연속으로 사상 최대 순이익을 경신했다. 지난해 3월에는 ‘라스트 맨’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며 고문으로 물러났다. 올초 히타치 개혁 스토리를 담은 저서 《더 라스트 맨》을 발간했다.
△1939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생 △1962년 도쿄대 공학부 전기공학과 졸업 △1962년 히타치제작소 입사 △1992년 히타치공장장 △1999년 부사장 △2003년 히타치소프트웨어엔지니어링 대표 △2007년 히타치소프트웨어엔지니어링 고문 △2009년 히타치 사장 겸 회장 △2014년 고문
창사 105년 된 히타치제작소, 일본 'B2B 대표주자'…작년 매출 10조엔
회사를 창립한 지 105년이 된 히타치제작소는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 간 거래(B2B) 사업지주회사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기·전자 분야가 사업의 중심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손실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일본 제조업체 사상 최대 규모인 7873억엔(당시 환율 기준 약 10조2000억원)의 적자를 냈다. 2009년부터 디스플레이, TV, PC사업 등을 줄줄이 정리하고 전력, 정보통신, 철도사업에 집중하는 사회 인프라 기업으로 변신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2014 회계연도에는 매출 9조7749억엔, 순이익 2194억엔을 달성했다. 자회사가 996개, 종업원은 33만3100여명이다.
도쿄=서정환 특파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