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금속·발암물질, 아빠 통해서도 유전된다"
“엄마의 건강 상태나 생활 환경이 아이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지만 아빠나 할아버지의 영향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성의 정자 상태가 아이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달 27일 경기 성남시 차바이오컴플렉스에서 열린 ‘제10차 환태평양 생식의학회’ 학술대회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제니스 베일리 캐나다 라발대 교수(사진)는 “각종 환경오염 물질이 남성의 정자를 통해 손자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난임이나 태아의 유전질환 원인 등을 파악할 때 여성은 물론 남성의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일리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 정자가 만들어질 때 일어난 변화가 자식은 물론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의 동물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암컷 쥐에게 농약, 다이옥신 등으로 오염된 물개를 먹게 한 뒤 이 쥐가 낳은 수컷 쥐(A)를 이용해 후세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했다. 그 결과 A의 정자를 통해 생긴 2세대 쥐(B)는 체중이 줄고 생식기능이 떨어지고 내장 위치가 바뀌는 기형이 나타났다. B의 후손인 3세대 쥐(C)에게도 같은 문제가 생겼다.

베일리 교수는 “A의 정자는 암컷의 뱃속 태아일 때 이미 오염된 상태였다”며 “이렇게 바뀐 수컷의 유전정보가 다음 세대와 그 다음 세대에 전달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남성 난임 연구는 정자 운동이 활발한지, 정자 개수가 몇 개인지 등에만 집중됐다. 이번 연구는 난임 연구를 할 때 남성의 후성유전 정보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후성유전은 생활습관, 환경오염 등으로 바뀐 유전정보가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는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 살충제를 많이 쓰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중금속 등에 오염된 음식을 많이 먹는 북극의 에스키모인 등을 대상으로 추가 연구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베일리 교수는 내년부터 미국생식학회 회장을 맡는다. 미국생식학회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 등 기초생식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5000여명이 모인 단체다. 이번 방한은 차광렬 차병원그룹 회장이 설립한 환태평양 생식의학회 초청으로 이뤄졌다. 환태평양 생식의학회는 학술대회에 주요 해외 과학자를 초청해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교류의 장이다. 베일리 교수는 “환태평양 생식의학회는 20년 동안 여러 연구 성과를 내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며 “기초와 임상분야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의미 있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