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점점 모호해지는 생명체와 기계의 경계
영화 ‘배트맨 리턴즈’에서 눈 덮인 거리를 행진하는 펭귄 떼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걸어갈 수 있는 펭귄 한 마리를 컴퓨터로 만든 다음, 이 펭귄을 수십 마리 복제하는 방식이다. 각 펭귄은 다른 펭귄과 충돌하지 않고, 혼자 떨어져서 걷지 않는 등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을 지키도록 프로그래밍했다. 이 펭귄 무리를 스크린 위에 풀어놨더니 ‘진짜 군중’처럼 서로 밀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기계적’이라는 수식어는 흔히 자연 상태의 대척점에 놓여 있는 인공적인 모습을 묘사할 때 쓰인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계는 점점 자연을 닮아가고 있다. 행동 패턴만 봐서는 자연을 관찰한 것인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꾸며낸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 분야도 많다. ‘배트맨 리턴즈’의 펭귄 떼의 움직임을 만들어낸 컴퓨터 과학자 크레이그 레이놀즈의 알고리즘은 생물학자들이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 검토할 정도였다. 저명한 과학 저널리스트인 케빈 켈리가 쓴 《통제 불능》에 담긴 메시지다.

[책마을] 점점 모호해지는 생명체와 기계의 경계
도시 시뮬레이션 게임인 ‘심시티’는 1989년 처음 탄생해 수차례의 업데이트를 거치며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는 게임이다. 공장을 짓고 도로를 포장하는 등 직접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운영한다. 이 도시는 실제 도시처럼 움직인다. 예를 들어 아무리 도시의 상업을 발달시키고 미관을 가꿔도 소방서를 적절한 위치에 충분히 마련하지 않으면 핵 발전소에서 불이 났을 때 도시가 잿더미가 된다. 이 게임은 워낙 그럴듯해서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실제 도시의 역동적 흐름을 입증하는 데 사용한다.

‘만들어진 것’이든 ‘태어난 것’이든 생명과 비슷한 특성을 가지는 시스템인 ‘비비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 시작됐다. 미국 컴퓨터 과학자 크리스토퍼 랭턴은 1987년 인공 생명 관련 워크숍을 열었다. 화학자와 수학자, 철학자, 로봇 연구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생명의 정의를 토론하는 자리였다. ‘자기 복제’, ‘진화 능력’, ‘활동을 하기 위한 대사작용’ 등 한 생물리학자가 나열한 생명의 특징은 도발적이었다. 컴퓨터 바이러스도 이 분류에 포함돼서다.

생명체의 진화를 모방한 유전 알고리즘, 각 구성원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전체 시스템이 변화하는 모습에 주의를 기울인 복잡계 연구 등 최근 정밀하게 다듬어지고 있는 과학·공학 분야의 연구 패러다임은 생명체와 인공물 사이의 경계를 더 모호하게 흐려 놓는다. 저자는 새로운 시대에는 인간이 기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버려야 함을 암시한다. 기계가 점차 야생성을 띠게 됨에 따라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1994년 출간된 책이 국내에 처음 번역됐다.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사진)의 모티브가 된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대본 리딩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배우 키아누 리브스의 일화가 입소문을 타 유명해졌다. 미래의 생명체와 기계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통찰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핵심 아이디어만 간추리면 책의 두께가 훨씬 얇아질 수 있을 듯하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