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웨이퍼(반도체를 만들기 전 단계)에 회로를 그려넣는 것을 리소그래피라고 한다. 리소그래피 장비는 비싸다. 비싼 것은 하나에 1억유로(약 1300억원)씩이다. 인텔, 삼성, TSMC 같은 반도체업체들은 이런 장비를 사다가 반도체를 만들어 판다.

이 장비를 만드는 시장의 85%를 점유하고 있는 업체가 있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인근 펠트호번에 본사를 둔 ASML이다. 선진 반도체 재료 리소그래피(Advanced Semiconductor Materials Lithography)라는 뜻에서 유래한 사명인데, 지금은 원 뜻대로 풀어서 쓰지 않고 ASML이라는 약어만 사용한다. 기업가치가 340억달러(약 44조원)에 달하는 우량 회사지만 한정된 기업 고객만 상대하다 보니 보통 사람에겐 이름이 좀 낯설다.

1984년 설립된 ASML의 역사는 무어의 법칙과 싸운 역사다. 인텔의 공동 창업자인 고든 무어는 1960년대에 마이크로칩의 집적도가 2년마다 2배로 높아진다는 ‘무어의 법칙’을 내놨다. 이후 50년이 넘도록 이 법칙은 반도체업계를 지배하고 있다.

반도체의 집적도가 2배로 높아진다는 말은, 크기가 절반으로 줄어도 같은 정보처리 능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2배로 정교하게 회로를 그려넣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ASML이 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무어의 법칙이 지속되는지 여부는 이 회사의 연구개발(R&D) 역량에 상당히 의존한다.

최근 이 회사는 이 부문에서 상당한 성과를 이뤄냈다. 극자외선(EUV)을 거울을 이용해 쬐어서 아주 미세하고 정교한 회로를 웨이퍼에 그려넣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개발비만 60억달러에 달한다. TSMC 등이 이 장비를 여러 대 구입했다.

너무나 장비가 비싼 탓에 수요가 금세 늘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탓에 유로넥스트와 나스닥에 상장된 ASML의 주가는 올 들어 8%가량 빠졌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지속적으로 집적도를 향상시킨 제품을 내놓을 수 있는 ASML의 기술력에 주목하고 있다.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사진)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 한 인터뷰에서 “무어의 법칙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무어의 회사인 인텔조차도 물리적 한계 때문에 집적도가 2배로 늘어나는 기간이 이제 2년은 무리고 2.5년 정도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마당인데, 그는 이런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 베닝크 CEO는 “우리의 경쟁자는 다른 회사라기보다는 무어의 법칙”이라며 “이 법칙이 더 이상 실현되지 않는 순간은 우리의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순간인데, 아직 우리에겐 많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