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상하이 의거' 항일투사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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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중국 100만 대군도 이루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이 해냈다.”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이 중국 국민당을 이끌며 항일운동을 하던 시절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 의거에 대해 격찬했던 말이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29일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및 전승 축하연 자리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을 비롯한 일제 주요 인사들을 처단했다. 이 의거는 중국 측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윤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윤우의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자퇴, 한학 공부를 했다. 1920년대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다 일제 감시 대상이 돼 193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1년 백범 김구와 만나 한인애국단에 입단했고, 1932년 훙커우공원에서 거사를 했다.
의거 직후 일본군에 체포돼 일본으로 압송, 그해 12월19일 25세를 일기로 총살형을 받고 순국했다. 유해는 1946년 조국으로 봉환돼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윤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윤우의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자퇴, 한학 공부를 했다. 1920년대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다 일제 감시 대상이 돼 193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1년 백범 김구와 만나 한인애국단에 입단했고, 1932년 훙커우공원에서 거사를 했다.
의거 직후 일본군에 체포돼 일본으로 압송, 그해 12월19일 25세를 일기로 총살형을 받고 순국했다. 유해는 1946년 조국으로 봉환돼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