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라이프] 문경안 볼빅 회장 "도전은 늘 설레…골프든 사업이든 끝장 봐야 직성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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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오피스 - '국산 컬러볼 돌풍' 문경안 볼빅 회장
반쯤 망해 있던 회사 인수해 6년 만에 매출 50배로 키워
골프 좋아하다 회사까지 인수
회사 야전침대 놓고 24시간 근무…"가격 두 배 안쳐주면 못주겠다"
품질 하나 믿고 저가 수출 중단…6개월 뒤 끊겼던 주문 다시 몰려
모든 게 지성이면 감천이죠
시작하면 될 때까지 밀어붙여…한번 맺은 인연도 끝까지 챙겨
스마트폰 저장 4000여명이 자산…그들에게서 아이디어와 영감 얻어
반쯤 망해 있던 회사 인수해 6년 만에 매출 50배로 키워
골프 좋아하다 회사까지 인수
회사 야전침대 놓고 24시간 근무…"가격 두 배 안쳐주면 못주겠다"
품질 하나 믿고 저가 수출 중단…6개월 뒤 끊겼던 주문 다시 몰려
모든 게 지성이면 감천이죠
시작하면 될 때까지 밀어붙여…한번 맺은 인연도 끝까지 챙겨
스마트폰 저장 4000여명이 자산…그들에게서 아이디어와 영감 얻어
“신호등만 봐도 볼빅 컬러볼로 골프치고 싶게 만들 겁니다!”
다들 말렸다. 눈 많이 오는 겨울에나 쓰는 ‘컬러볼’로 천하를 제패하겠다고 큰소리치니 그랬다. 철강 사업으로 번 수십억원을 탈탈 털어 넣자 가족들까지 낯빛이 변했다. 문경안 볼빅 회장(57·사진)은 버텼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그럴 만도 했다. 2009년 골프광이었던 그가 반쯤 망해 있던 토종 골프공 업체 볼빅을 ‘뭔가에 홀린 듯’ 인수했을 때였다. 국내 골프공 시장은 수입 브랜드 천하였다. 타이틀리스트, 캘러웨이 같은 절대강자들의 점유율이 95%에 달했다. 볼빅 등 올망졸망한 국산 브랜드가 나머지 5%를 채웠다. 막상 인수하고 보니 기가 막혔다.
“저가 제품이라는 인식이 무슨 낙인 같았어요. 그보다 더 견고했던 건, 시장을 뒤집을 수 없다는 직원들의 패배주의였습니다.”
승부사, ‘저가인식 깨기’ 정면돌파
승부사 기질이 발동했다. 대기업(선경) 무역맨 출신인 그는 건설사(건영건설) 통상 부문 자회사에서 일하다 1997년 서른 아홉에 철강 유통회사 비엠스틸을 창업했다. 10여년 만에 매출을 500억원대로 키웠다. 골프(핸디캡 4)든 사업이든 뭐든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더 큰 도전’은 늘 설레는 화두였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출근 아침 7시30분, 퇴근 밤` 11시30분이라고 공표를 해 버렸어요. 강행군을 함께할 사람은 남고, 아니면 갈 길을 가라고요.”
직원 24명 중 절반이 짐을 쌌다. 회사에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스스로 24시간, 365일 근무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제품 공부. “제품이 좋아서 회사 인수까지 했는데, 뭐가 문제일까?” 경쟁사 제품과의 정밀 비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더 확신이 들었다. “수입 브랜드에 중국산이 많다 보니 균일성이 떨어졌어요. 오히려 전량 국내에서 생산하는 우리 제품이 비거리나 방향성 등에서 안정적인 결과를 냈습니다. 이거다 싶었죠.”
프리미엄 마케팅을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제품 포장에서부터 CI(Corporate Identity·기업 이미지)까지 다 뜯어고쳤다. 제품 질을 증명하겠다며 공개 시험까지 했다. 내기를 좋아하는 골퍼들이 많다는 데 착안해 일명 ‘뽑기통’을 국내 처음으로 개발해 뿌렸고, 캐디들에게는 컬러볼로 제작한 카트용 열쇠고리를 선물했다. 공 찾을 일이 많은 캐디들은 ‘눈에 띄는’ 컬러볼을 선호했다. 당연히 ‘구전 마케팅’의 맨 앞에 캐디들이 섰다. “주로 여성들이 쓰던 컬러볼이 남성 골퍼들에도 점차 확산됐던 계기 중 하나였다”고 문 회장은 설명했다.
저가(低價) 수출은 아예 전면 중단했다. 담당자가 반발했다. 월 매출(5000만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돈줄’이었기 때문. 당장 매출이 2000만원대로 떨어졌다. 1등을 하려면 그 ‘중독’을 빨리 끊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해외 바이어들한테도 값을 두 배 이상 쳐주지 않으면 못 팔겠다고 버텼어요. 품질을 인정해 달라고요. 거래를 끊어도 어쩔 수 없다고 밀어붙었죠. 6개월쯤 되니까 끊어졌던 주문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인수 직전 7억원(2008년)에 불과했던 회사 매출은 인수한 그해 46억원으로 수직 상승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350억여원으로 6년 새 50배로 급증했다.
‘초심+열정’이면 안 되는 것 없어
그의 좌우명은 담백하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못 오를 나무를 오르다 떨어져도 깨달음이 있어요. 한 번 찍으면 갈 데까지 가 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고요.”
거래처가 부도를 내도 그는 제품을 곧장 회수하지 않는다. 대신 부도 원인을 한 번 더 분석한다. “고의가 아니면 살려서 같이 가야죠. 그래야 채권도 회수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한 번 맺은 인연은 뭉근하게 오래 간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4000여명의 지인들은 ‘아이디어와 영감’의 보고다.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상시 대화채널이다. 이들은 그의 고객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든 컬러볼을 홍보하기 위해 자동차를 밴으로 바꾸고 트렁크 안에 손수 진열대를 짜 넣었다. “회장인 제가 먼저 나서니까 차를 밴으로 바꾸는 직원들이 하나둘 늘더군요. 하하!”
선수 후원도 마찬가지다. 지난 7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157전 만에 첫 승을 올린 최운정(25)은 그가 4년 전인 2011년 발굴했다. 당시 그의 세계랭킹은 80위권 밖이었다. 문 회장은 “한해 30개가 넘는 LPGA 대회를 다 소화해 내는 뚝심에 투자했는데, 그가 그 믿음에 응답했다”고 말했다.
‘글로벌 1등’ 되는 날까지
그는 카카오톡에 ‘1등이 되는 그날까지 파이팅!’이라는 글을 늘 띄워 놓는다. ‘글로벌 1등이 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일단 국내 시장 점유율을 30% 안팎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만큼 해외 시장 점유율을 7% 안팎까지 확대하는 게 향후 과제다.
해외에 집중된 마케팅은 그 해법이다. 볼빅은 30명의 국내외 선수가 소속된 골프단을 운영하는 등 브랜드 마케팅에 전체 매출의 30~40%를 매년 투입한다. 마케팅 비중이 너무 큰 거 아니냐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그는 오히려 더 확대하고 싶어한다. 어중간하게 투자했다간 살아남지 못한다는 판단에서다. 2013년 국내 골프업체 중 처음으로 LPGA 2부 투어를 후원하고 대회까지 만든 데 이어 내년에는 1부 투어 대회까지 후원을 확대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 인구 4분의 3이 아직 골프를 치지 않고 있어요.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은 이제 막 골프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요.”
못내 아쉬운 건 해외 브랜드가 막연히 ‘품위 유지’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프로골퍼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외국 선수들은 자국 기업들과 똘똘 뭉쳐 ‘기업 후원-선수 홍보’라는 선순환 구조를 갈수록 탄탄하게 하는데, 골프로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은 오히려 ‘기업 따로, 선수 따로’라는 쓴소리다. 그는 “일본 선수랑 볼 사용 계약을 하려 했더니 ‘당신네 나라 선수들도 안 쓰는 걸 내가 써주니까 계약금을 두 배로 달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씁쓸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그는 조만간 회사를 상장(코넥스)하고 세계 최초로 개발한 ‘6피스볼(6겹으로 된 골프공)’도 선보일 계획이다.
“제품이 좋다는 점을 계속해서 증명하면 결국 다들 알아주겠죠.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 문경안 회장 프로필
△1958년 경북 김천 △홍익대 국제경영대학원 졸업(석사) △건영통상 △SK네트웍스 △1997년 비엠스틸 창업 △2009년 볼빅 인수 △한국스포츠과학기술포럼 부회장 △건양대 세무학과 겸임교수 △비엠통상 회장(현) △볼빅 회장(현)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
다들 말렸다. 눈 많이 오는 겨울에나 쓰는 ‘컬러볼’로 천하를 제패하겠다고 큰소리치니 그랬다. 철강 사업으로 번 수십억원을 탈탈 털어 넣자 가족들까지 낯빛이 변했다. 문경안 볼빅 회장(57·사진)은 버텼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그럴 만도 했다. 2009년 골프광이었던 그가 반쯤 망해 있던 토종 골프공 업체 볼빅을 ‘뭔가에 홀린 듯’ 인수했을 때였다. 국내 골프공 시장은 수입 브랜드 천하였다. 타이틀리스트, 캘러웨이 같은 절대강자들의 점유율이 95%에 달했다. 볼빅 등 올망졸망한 국산 브랜드가 나머지 5%를 채웠다. 막상 인수하고 보니 기가 막혔다.
“저가 제품이라는 인식이 무슨 낙인 같았어요. 그보다 더 견고했던 건, 시장을 뒤집을 수 없다는 직원들의 패배주의였습니다.”
승부사, ‘저가인식 깨기’ 정면돌파
승부사 기질이 발동했다. 대기업(선경) 무역맨 출신인 그는 건설사(건영건설) 통상 부문 자회사에서 일하다 1997년 서른 아홉에 철강 유통회사 비엠스틸을 창업했다. 10여년 만에 매출을 500억원대로 키웠다. 골프(핸디캡 4)든 사업이든 뭐든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더 큰 도전’은 늘 설레는 화두였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출근 아침 7시30분, 퇴근 밤` 11시30분이라고 공표를 해 버렸어요. 강행군을 함께할 사람은 남고, 아니면 갈 길을 가라고요.”
직원 24명 중 절반이 짐을 쌌다. 회사에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스스로 24시간, 365일 근무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제품 공부. “제품이 좋아서 회사 인수까지 했는데, 뭐가 문제일까?” 경쟁사 제품과의 정밀 비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더 확신이 들었다. “수입 브랜드에 중국산이 많다 보니 균일성이 떨어졌어요. 오히려 전량 국내에서 생산하는 우리 제품이 비거리나 방향성 등에서 안정적인 결과를 냈습니다. 이거다 싶었죠.”
프리미엄 마케팅을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제품 포장에서부터 CI(Corporate Identity·기업 이미지)까지 다 뜯어고쳤다. 제품 질을 증명하겠다며 공개 시험까지 했다. 내기를 좋아하는 골퍼들이 많다는 데 착안해 일명 ‘뽑기통’을 국내 처음으로 개발해 뿌렸고, 캐디들에게는 컬러볼로 제작한 카트용 열쇠고리를 선물했다. 공 찾을 일이 많은 캐디들은 ‘눈에 띄는’ 컬러볼을 선호했다. 당연히 ‘구전 마케팅’의 맨 앞에 캐디들이 섰다. “주로 여성들이 쓰던 컬러볼이 남성 골퍼들에도 점차 확산됐던 계기 중 하나였다”고 문 회장은 설명했다.
저가(低價) 수출은 아예 전면 중단했다. 담당자가 반발했다. 월 매출(5000만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돈줄’이었기 때문. 당장 매출이 2000만원대로 떨어졌다. 1등을 하려면 그 ‘중독’을 빨리 끊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해외 바이어들한테도 값을 두 배 이상 쳐주지 않으면 못 팔겠다고 버텼어요. 품질을 인정해 달라고요. 거래를 끊어도 어쩔 수 없다고 밀어붙었죠. 6개월쯤 되니까 끊어졌던 주문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인수 직전 7억원(2008년)에 불과했던 회사 매출은 인수한 그해 46억원으로 수직 상승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350억여원으로 6년 새 50배로 급증했다.
‘초심+열정’이면 안 되는 것 없어
그의 좌우명은 담백하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못 오를 나무를 오르다 떨어져도 깨달음이 있어요. 한 번 찍으면 갈 데까지 가 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고요.”
거래처가 부도를 내도 그는 제품을 곧장 회수하지 않는다. 대신 부도 원인을 한 번 더 분석한다. “고의가 아니면 살려서 같이 가야죠. 그래야 채권도 회수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한 번 맺은 인연은 뭉근하게 오래 간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4000여명의 지인들은 ‘아이디어와 영감’의 보고다.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상시 대화채널이다. 이들은 그의 고객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든 컬러볼을 홍보하기 위해 자동차를 밴으로 바꾸고 트렁크 안에 손수 진열대를 짜 넣었다. “회장인 제가 먼저 나서니까 차를 밴으로 바꾸는 직원들이 하나둘 늘더군요. 하하!”
선수 후원도 마찬가지다. 지난 7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157전 만에 첫 승을 올린 최운정(25)은 그가 4년 전인 2011년 발굴했다. 당시 그의 세계랭킹은 80위권 밖이었다. 문 회장은 “한해 30개가 넘는 LPGA 대회를 다 소화해 내는 뚝심에 투자했는데, 그가 그 믿음에 응답했다”고 말했다.
‘글로벌 1등’ 되는 날까지
그는 카카오톡에 ‘1등이 되는 그날까지 파이팅!’이라는 글을 늘 띄워 놓는다. ‘글로벌 1등이 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일단 국내 시장 점유율을 30% 안팎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만큼 해외 시장 점유율을 7% 안팎까지 확대하는 게 향후 과제다.
해외에 집중된 마케팅은 그 해법이다. 볼빅은 30명의 국내외 선수가 소속된 골프단을 운영하는 등 브랜드 마케팅에 전체 매출의 30~40%를 매년 투입한다. 마케팅 비중이 너무 큰 거 아니냐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그는 오히려 더 확대하고 싶어한다. 어중간하게 투자했다간 살아남지 못한다는 판단에서다. 2013년 국내 골프업체 중 처음으로 LPGA 2부 투어를 후원하고 대회까지 만든 데 이어 내년에는 1부 투어 대회까지 후원을 확대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 인구 4분의 3이 아직 골프를 치지 않고 있어요.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은 이제 막 골프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요.”
못내 아쉬운 건 해외 브랜드가 막연히 ‘품위 유지’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프로골퍼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외국 선수들은 자국 기업들과 똘똘 뭉쳐 ‘기업 후원-선수 홍보’라는 선순환 구조를 갈수록 탄탄하게 하는데, 골프로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은 오히려 ‘기업 따로, 선수 따로’라는 쓴소리다. 그는 “일본 선수랑 볼 사용 계약을 하려 했더니 ‘당신네 나라 선수들도 안 쓰는 걸 내가 써주니까 계약금을 두 배로 달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씁쓸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그는 조만간 회사를 상장(코넥스)하고 세계 최초로 개발한 ‘6피스볼(6겹으로 된 골프공)’도 선보일 계획이다.
“제품이 좋다는 점을 계속해서 증명하면 결국 다들 알아주겠죠.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 문경안 회장 프로필
△1958년 경북 김천 △홍익대 국제경영대학원 졸업(석사) △건영통상 △SK네트웍스 △1997년 비엠스틸 창업 △2009년 볼빅 인수 △한국스포츠과학기술포럼 부회장 △건양대 세무학과 겸임교수 △비엠통상 회장(현) △볼빅 회장(현)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