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온천, 사케의 고장 일본 니가타…겨울에 가야 보인다 '설국'의 매력
니가타를 찾은 날, 눈이 내렸다. 아니 퍼부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눈은 하염없이 쏟아졌다. 회색빛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은 사물의 실루엣만 남기고 만물을 삼켜버릴 듯했다. 공항에서 니가타현 유자와(湯澤)로 가는 길, 차는 곧 시미즈 터널로 들어섰다. 어두운 터널이 10여분간 이어졌다. 터널의 길이는 13㎞에 달했다. 그리고 끝이 없을 것 같은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리고 설국

라듐 온천으로 유명한 무라스기 온천마을
라듐 온천으로 유명한 무라스기 온천마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의 소설 《설국(雪國)》의 이 유명한 첫 문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니가타는 그 ‘설국’의 무대다. ‘설국’은 눈에 파묻힌 적요한 산골 풍경과 남녀의 섬세한 심리를 감각적인 문장으로 묘사한 일본 서정소설의 고전이다. 소설은 무용 평론을 하는 주인공 시마무라가 휴양차 찾은 유자와 마을에서 만난 열정적 성격의 게이샤 고마코와 순진무구한 여성 요코 사이에서 벌어지는 삼각관계를 묘한 필치로 그려낸다. 가와바타는 이 소설로 1968년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가와바타는 이 소설을 다카한 료칸에서 썼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증개축해 1930년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따로 기념관을 만들어 가와바타가 묵었던 방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소설의 묘사처럼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와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나는’ 교토 산 쇠주전자가 고요한 눈의 나라에서 소설을 구상하던 가와바타를 떠올리게 한다. 여관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은 눈 덮인 삼나무 숲. 소설 속 시마무라와 고마코가 첫 데이트를 한 곳이 이 숲 속 신사(神社)인데, 소설 속 분위기 그대로다.

온천에서 맛보는 일본 최고의 사케

니가타는 북서쪽으로 바다에 면하고, 남동쪽으로 연봉에 가로막힌 지리적 특성 때문에 겨울이면 산을 넘지 못한 수증기가 엄청난 양의 눈을 쏟아낸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니가타의 엄청난 눈이 니가타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눈이 녹아 내린 물이 최고의 쌀을 길러 내고, 그 쌀이 청주를 빚어내는 것이다. 니가타에는 양조장 숫자만도 96개에 달하며 개별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브랜드까지 모두 합치면 500개쯤 된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구보타, 고시노칸바이, 하카이산 등도 니가타에서 생산된다.

다양한 사케를 한자리에서 즐기고 싶다면 신칸센 에치코유자와역 2층에 자리한 혼슈칸이 제격이다. 니가타에서 생산된 100여가지의 사케를 시음할 수 있다. 500엔을 내면 술잔과 다섯 가지의 사케를 맛볼 수 있는 코인을 준다. 시음 후 마음에 드는 사케를 구입할 수도 있다.

니가타는 정적이고 편안한 여행지다. 니가타는 일본의 현 가운데 네 번째로 온천이 많은 곳이다. 니가타시 동편의 에치고 평야를 한 시간쯤 내달리면 아가노시에 닿는데, 그곳 고즈(五頭) 연봉 아래 삼나무 숲가에는 1200년 역사의 무라스기 온천마을이 있다. ‘장생(長生)의 샘’이라고 불려온 마을로 니가타에선 유일하게 라듐온천을 갖추고 있다. 예로부터 무라스기는 장수마을로 유명한데, 유명 의사가 배출되지 않은 이유가 건강 만점의 온천수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게이샤의 춤사위, 일본을 느끼다

니가타 북방문화박물관에서 만난 게이샤
니가타 북방문화박물관에서 만난 게이샤
니가타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그 어느 곳보다 잘 간직한 곳이다. 니가타 근교 요코코시마치에 자리한 ‘북방문화박물관’은 에도시대 중기 일본 제일의 부농이었던 이토가(家)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다. 2만9100㎡ 부지에 건평 3967㎡ 규모로 만들어졌는데, 대저택에는 65개의 방과 5개의 다실로 둘러싸인 정원, 응접실, 고고자료실, 부엌, 선물가게 등이 들어서 있다.

이 집의 특징은 나무 기둥을 자르지 않고 통째로 사용했다는 것. 현재 8대째 주인이 지키고 있는데 부엌이며 가재도구, 서화 등이 메이지 시대 모습 그대로다. 1925년 조명이 램프에서 전기로 바뀌고 창틀에 붙어 있던 창호지가 유리로 교체된 것 외에는 완공됐을 당시와 똑같은 모습을 지키고 있다. 지금도 유리창이 깨지면 70년 전에 주문해놓은 옛날 판유리를 창고에서 꺼내 갈아 끼운다고 한다.

가옥 내부의 큰 마루에서는 게이샤 공연이 열리곤 한다. 니가타의 후루마치 지역은 에도시대부터 교토의 기온, 도쿄의 신바시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게이샤의 고장이었다.

근대 일본의 개항지이자 서해안의 물류 중심지인 니가타에는 일거리와 돈을 좇는 사내들이 몰려들었고, 이를 상대로 하는 게이샤 또한 번성했다. 목까지 희게 분칠한 어린 게이샤 둘이 춤을 추고, 나이 지긋한 게이샤 둘은 사메센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지극히 형식적인 동작과 표정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여행정보

대한항공은 인천~니가타 직항편을 매일 운항한다. 소설 《설국》의 무대가 됐던 유자와 지역은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1시간10분 정도 걸리며, 니가타까지는 2시간30분 소요된다. 1시간에 두 대꼴로 운행한다. 니가타는 스키로도 유명하다. 니가타 내 스키장은 60여개. 산을 낀 마을에는 으레 스키장이 들어서 있다. 이 중 묘코는 일본인 사이에서 ‘가장 일본다운 스키장’으로 손꼽힌다. 조신에쓰고겐 국립공원에 있는 아카쿠라칸코 스키장은 1937년 12월12일 일본 최초로 국제스키장으로 공인받았다. 니가타현관광협회 한글사이트(enjoyniigata.com/ko)에 스키장 정보가 나와 있다. 나에바 스키장(princehotels.co.jp/ski/naeba)은 식당, 스파 시설 등을 잘 갖추고 있다. 니가타현 한국사무소 홈페이지(niigata.or.kr) 참고.

니가타=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ssoocho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