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서서 먹는 음식은 생소하다. 역사 드라마를 봐도 주막 손님들은 거적이나 가마니라도 깔고 앉아 식사하고 술을 마신다 .

일제강점기에 다치노미야(立飮屋)라는 일식 주점이 경성(京城)에서 인기를 끌었다. 다치노미야는 나중에 ‘선술집’이라는 우리말로 정착된 듯하다. 의자 없이 서서 간단히 한두 잔 먹고 가는 간이술집을 말한다. 선술집이 간이술집의 대명사가 되면서 나중에는 앉아서 먹어도 선술집이라고 불렀다.
500도 가까운 고열로 굽는 갈비.
500도 가까운 고열로 굽는 갈비.
자욱한 연기 속에 노릇하게 굽는 갈비

1953년 문 연 노고산동  연남서서갈비
1953년 문 연 노고산동 연남서서갈비
선술집 중에서도 묵직한 소갈비를 서서 먹는 집이 있다. 흘러간 옛 영화배우의 예명 같기도 한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있는 ‘연남서서갈비’다. 서서갈비라는 상호는 서울에 아주 많다. 이집에서 시작한 이름인데, 어쩌다가 누구나 쓸 수 있는 이름이 돼버렸다. 상표권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에 굳은 관행이다.

연남서서갈비는 서울과 신촌의 오래된 기억을 가진 노포(老鋪)다. 한겨울 추위에도 이 집에선 줄을 서서 고기를 굽는다. 반찬도 없다. 그냥 서서 고기를 굽고, 술잔을 비운다. 찬바람이 부는데도 문을 열어놓는다. 그래서 손님들은 외투 차림으로 자욱한 연기 속에 선 채 붉은 갈비를 굽는다. 마치 컬트무비의 한 장면 같다.

“의자는 본디 있었어. 각목으로 얼기설기 엮은 의자가 몇 개 있었는데, 술꾼이 앉으니 견뎌내나. 다 부서지지. 결국 의자 없이 영업했는데, 그게 이 세월이 된 거요.”

옛 방식대로 드럼통에서 고기를 굽는다.
옛 방식대로 드럼통에서 고기를 굽는다.
서울 사투리를 쓰는 이대현 사장(73)의 말이다. 그는 태어나 여기서만 살았다. 1953년 창업했을 때는 소갈비를 파는 집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술안주가 될 만한 것을 미군이 버린 드럼통에서 구웠다. 당시 그는 어린 소년이었다. 어머니가 폭격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단둘이 먹고살자고 시작한 간이술집이었다.

원래 상호라 할 것이 없는 무허가 집이었다. 서서갈비라는 애칭도 손님들이 알아서 붙인 것이다. 상호 등록 같은 건 몰랐다. 그때는 그렇게 손님이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흔했다. 공식 등록상호가 없으니까. 주인의 스타일을 봐서 곰보집 털보집, 위치에 따서 골목집 육교집, 주인의 고향을 빌려 전주집 목포집 대구집, 이런 식이었다. 그것이 나중에 세제가 정비되면서 정식 상호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연남서서갈비라는 이름도 이렇게 탄생했다.

연탄의 고열이 맛의 비결

이대현 사장이 갈비를 굽고 있다.
이대현 사장이 갈비를 굽고 있다.
원래 갈비 부위는 아주 특별한 것이다. ‘갈비’라고 한마디로 부르지만 각기 다른 맛과 조직이 한 뼈에 붙어 있다. 한 채에 수십㎏이 나가니까 소고기 부위 중에 가장 큰 덩어리다. 기름이랑 뼈를 빼면 사실 크게 먹을 게 없는 부위다. 그래서 갈비구이는 귀하다.

이집의 갈비는 터프하고 양이 많다. 아직도 연탄으로 불을 때는데, 강한 화력을 내기에 연탄만 한 게 없다고 한다. 500도 가까운 고열로 굽는 것이 비결이다. 겉은 익어도 속은 촉촉하게 유지된다.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게 이대현 사장의 오랜 노하우다. 그는 지금도 제일 먼저 나와서 새벽부터 연탄불을 챙긴다. 지금도 갈비를 직접 펴는데, 가게에서 가장 숙달된 기술자다. 인물이 훤하고 나이도 들어 보이지 않지만 손을 보면 어떻게 이 가게를 이끌어왔는지 알 수 있다. 노동에 시달린 전형적인 ‘곰발바닥 손’이다. 이 손으로 그는 가게를 지켰다. 이제 가게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도 꽤 되겠지만 그는 여전히 가장 먼저 불을 피운다.

손님들은 대낮부터 들이닥쳐 고기를 굽는다. 서울에서 이런 풍경은 흔치 않을 것이다. 고기가 다 팔리면 한낮에도 문을 닫는다. 살짝 힌트를 주자면, 이 집에 가기 위해 별도로 간이 우비를 마련하는 이들이 있다. 가게 안에 퍼지는 자욱한 연기에서 버티기 위함이다.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109의 69, (02)716-2520

글= 박찬일 셰프 chanilpark@naver.com / 사진= 노중훈 여행작가 superwin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