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해 11월2일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 기간에 두 정상 취임 후 첫 한·일 양자 회담을 하고 현안을 논의했다. 두 나라는 한 달 보름 뒤 양국 관계의 최대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타결지었다. 한경DB
박근혜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해 11월2일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 기간에 두 정상 취임 후 첫 한·일 양자 회담을 하고 현안을 논의했다. 두 나라는 한 달 보름 뒤 양국 관계의 최대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타결지었다. 한경DB
2015년 12월28일. 한·일 관계의 최대 ‘난제’로 꼽혔던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최종 타결됐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10억엔(약 100억원) 규모의 기금 설립도 약속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합의 이행을 전제로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不可逆)적인 해결’을 확인했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위안부 실상을 공개 증언한 이후 24년 동안 한·일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문제가 마침내 양국 정부 차원에서 일단락된 것이다.

정부는 “사안의 시급성과 현실적 제약을 고려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협상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시민단체들도 연일 ‘위안부 졸속 협상’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 50년 전 한일협정 체결 전후 반대 집회가 불거졌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평가는 엇갈리지만 이번 위안부 협상이 한·일 관계에 새 국면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발톱을 세웠던 두 나라가 ‘한·일 수교 50주년’이라는 명분 아래 손을 맞잡았다는 점에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협상 타결 후 “한·일 관계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했다. 그러나 한일협정 이후에도 한·일 관계가 수많은 위기에 봉착했듯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 시각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한일협정

한·일이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여전히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이 있다.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틀인 한일협정은 양국의 정치, 경제, 외교,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제는 이 협정이 과거사 인식과 처리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이를 해결하지 못한 채 맺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우호 관계를 구축한 한·일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 배상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다. 한일협정의 태생적 결함이 양국 간 갈등을 재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협정의 시초는 19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일은 같은 해 10월20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첫 예비회담을 시작했다. 한·일 회담은 1965년 최종 타결 때까지 공식회의만 일곱 차례였고 비공식 교섭은 1500회 이상 이어졌다. 14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회담은 여러 번 난관에 부딪혔다. 1953년 10월 3차 회담에서는 토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본 측 수석대표인 구보다 간이치로의 망언으로 암초에 부딪혔다.

구보다는 “대일 강화조약 체결 이전 수립된 한국 정부는 불법적 존재다”, “한국의 독립은 무효며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민에게 유익한 점도 많았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한국 측은 거세게 항의했고 회담은 결렬됐다. 이후 4차 회담은 4년 반 표류한 끝에 재개됐다. 그러나 한·일 기본관계, 청구권 문제, 어업 수역 문제 등에서 맞서며 협상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60년 4·19혁명, 1961년 5·16 군사정변 등 한국 내부의 정치적 격변도 협상의 걸림돌이 됐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11월12일 도쿄에서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한·일 회담 조기 타결에 합의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10월20일과 11월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보내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상과 담판을 짓도록 지시했다. 두 사람은 ‘무상원조 3억달러, 유상원조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의 청구권 자금에 합의하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했다. 막혀 있던 한·일 회담의 돌파구를 연 것이다. 이 합의는 양국 정부 간 최종 타결 과정에서 8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 이상)로 조정됐다. 14년간의 협상은 1965년 6월22일 한·일이 ‘대한민국과 일본국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정식 서명하면서 마무리됐다.
한·일 관계 '질곡의 50년' 막 내리나
경제성장 밑거름된 日 청구권 자금

한일협정은 양국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우호관계를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과거사와 개인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협정 문안에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적시하지 않았다는 점도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요인 중 하나다.

때문에 협정 체결 당시 국내에선 ‘굴욕 외교’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1964년에는 한·일 회담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면서 ‘6·3 사태’로 번졌다. 한일협정은 모호한 협정 문구와 내용 때문에 한·일 간 ‘분쟁의 씨앗’이 됐다는 비판도 받았다. 기본조약 2조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은 이 문구를 강압·불법에 의한 일제의 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불법·무효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은 체결 당시 합법이었으나 국교 정상화 시점부터 무효라고 얘기하고 있다. 일본은 35년간의 식민지배도 합법적 조약에 따라 이뤄졌다는 주장이다.

한일협정은 사할린 잔류 한인의 귀환,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 원자폭탄 피해 한국인의 치료와 보상 문제를 충분히 협의하지 못한 채 봉합됐다는 결함도 안고 있다. 이 문제는 최근까지도 양국이 풀어야 할 외교 현안으로 남겨져 있다.

한편으론 한일협정이 한국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도 있다. 우선 기본조약에서 일본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이다. 청구권협정을 통해 한국에 유입된 일본 자금이 한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됐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협정에 따라 1966년부터 1975년까지 일본에서 5억달러 규모의 물품과 용역이 유입됐고 산업 전반에 사용됐다. 포항제철소 건설과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 등 국가 기간산업과 사회기반시설 건설에도 투입됐다. 이 기간 한국의 국민총생산에 대한 일본 자금의 기여도는 연 1.04~1.61%였고 청구권 자금에 의한 국민총생산 증가율은 최고 1.73%에 이르렀다. 한국이 경제 대국이 되는 데 일본 자금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다.

‘용두사미’로 끝난 대일 외교, 질풍노도의 반세기

역대 정부는 정권 초반 외교 성과를 내기 위해 한·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다가 중후반 지지율 회복을 위해 대일 강경 기조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였다. 정권 말기에는 한·일 관계가 경색되는 양상이 되풀이됐다.

박정희 정부 때는 근대화를 위해 일본과 한일협정을 체결했으나 1973년 일본 한복판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면서 한·일 관계가 위기를 맞았다. 1975년 재일 한국인 문세광에 의한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면서 한·일은 ‘단교’ 직전까지 치달았다. 김영삼 정부 때는 ‘고노담화’(1993년)와 ‘무라야마 담화’(1995년)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일본 주요 인사들의 망언이 매번 한·일 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언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김대중 정부는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이끌어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발목을 잡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독도 도발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갈등의 요인이 됐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2011년 12월 노다 요시히코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충돌했고 이듬해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면서 한·일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의 ‘성의 있는 조치’를 전제로 취임 후 2년9개월여 동안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거부했다. 박근혜 정부 초기의 한·일 관계는 ‘수교 50주년 역사상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한·일 관계 2.0’ 시대 열릴까

얼어붙은 한·일 관계는 박근혜 정부에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미·일 동맹뿐 아니라 북핵 문제, 평화통일, 경제교류 등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협력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한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등을 위해서도 한·일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한·일 수교 50주년이었던 2015년 11월,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위안부 문제 조기 해결에 합의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지난달 28일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면서 경색됐던 양국 관계는 전환기를 맞았다. 한·일 관계가 정상화 단계에 진입하면서 동북아시아 역내 안정을 위해 중요한 외교 틀인 ‘한·미·일 3각 공조’가 복원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미·중 사이에서 한국이 외교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외교의 운신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한·일 관계 개선을 주문한 만큼 이번 위안부 협상 타결이 미국 요구에 부응하는 측면도 있다.

일각에선 이번 위안부 협상 타결이 경색된 한·일 관계 해빙의 물꼬를 튼 계기일 뿐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진창수 세종연구소장은 “일본의 보수 자민당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 책임을 인정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끝난 것은 아니다”며 “일본이 망언을 자제하고 피해자 치유 작업 등 후속 작업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협상을 계기로 우리 정부도 투명하게 외교적 결정을 내리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