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극일, 결국 국력이다
작년 말 그간의 중대한 숙제였던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일 간 합의를 이루고 해를 넘겼다. 이로써 양국 간의 파괴적 외교관계, 깊어 가던 증오의 늪에서 탈출할 계기가 조성됐다. 새해를 이렇게 희망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실로 상쾌한 일이다.

그러나 야당과 시민세력은 이 합의를 파괴할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굴욕외교’ ‘외교참사’로 규정해 정부에 재협상을 요구하고, 시민단체들과 범(汎)국민 반대운동도 벌이겠다고 한다. 모처럼 이룬 긍정적 과업을 늘 그렇듯 ‘국민 간의 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번 위안부 합의에서 한·일 중 누가 더 양보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외교는 타협의 결과로 이뤄진다. 그간 아베 정권의 저돌적 과거 역사 지우기 행태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일본국 총리대신으로서 사죄와 반성을 밝힌다”는 아베 신조 총리의 발언이 얼마나 어렵게 토해낸 단어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사죄나마 박근혜 정부가 미국의 압력을 강력히 요구했고 아직은 세계가 대한민국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거둔 결과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 누구에게 더 절박한 문제였을까. 2014년 말의 일본 내각부 여론조사에서는 ‘한국에 친밀감이 없다’는 응답이 66.4%로, 2011년 36.7%에서 거의 두 배로 치솟았다. 이렇게 한·일 감정이 악화된다고 해서 일본이 크게 아쉬울 바는 없다. 오히려 우익 언론과 정치가들이 활개치는 세상이 되고 서점가에는 혐한 서적이 넘쳐나게 팔린다. 일본인들은 이런 정치에 쏠려 그저 한국인을 지겹게 여길 뿐이다. 반면 우리는 절박하다. 60만 재일 한국인에게 무서운 경제적 고통과 삶의 위협이 가해지며 일본 관광객이 격감하고 국가안보·외교도 상처를 입는다. 이는 위안부 문제를 끝없이 감성적 문제로 방치할 수 없는 우리의 실존적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종걸 더민주 원내대표는 이번 합의가 “50년 전 제1차 한·일 굴욕협정에 이은 제2차 한·일 굴욕협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 한일협정을 안 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고립되고 낙후된 나라로 남아있을지 알 수 없다. 당시에도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는 극렬했지만 이때 도입된 무상 3억달러, 유상 재정·상업차관 5억달러는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등 경제개발 초기 사업과 산업화 투자를 수혈하는 귀중한 밑천이 됐다. 보다 중요한 점은 한국이 개방과 경제 건설에 확고한 의지를 가진 나라임을 세계에 보여준 것이다. 이후 세계은행, 아시아은행, 기타 해외로부터의 차관과 자금 도입이 본격화됐고, 한국은 세계 경제체제에 입문해 개방과 산업국가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해방 후 일본과의 관계에서 수많은 불쾌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비극 6·25전쟁은 패전국 만신창이였던 일본에 천우신조(天佑神助)의 행복이 됐다. 일본은 일시에 미군 전쟁물자·서비스의 조달기지가 돼 당시 군수물품 전담 공장만도 860곳에 달했다. 그 수입이 1952년 일본의 총 외화수입의 36.8%에 이르렀고, 자동차·조선·제철업 등의 생산 기반은 이때부터 획기적인 확대·혁신을 시작했다.

6·25전쟁 후 이승만 정부는 부흥부(1955)를 설치하고 다섯 차례 경제부흥계획을 세우는 등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제조업 확대와 자립경제기반 구축을 꾀했으나 미국은 이에 협조하지 않았다. 미국은 부패하고 무질서한 한국이 공업화와 자립을 이룰 나라로 믿지 않았으며, 그저 향후 동아시아의 축으로 키울 일본의 산업화를 도울 소비시장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누구보다 먼저 일본 은행들이 100억달러의 자금을 일제히 회수함으로써 외환위기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 모든 사태는 대한민국의 존재가 일본에 크게 뒤지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우리의 과거사 해결 능력도 최종적으로 우리의 국력·국격에 달려 있다. 향후 우리가 내부 분열로 주저앉으면 일본이 전보다 더 크게 한국인과 한국 역사를 조롱할 것임을 누구보다도 야당이 지각해야 하는 것이다.

김영봉 < 세종대 석좌교수·경제학 kimyb5492@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