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와세다대 이공학부 3학년생인 다케우치 유지 씨는 지난해 말 일본 최대 모바일 게임업체인 디엔에이(DeNA)로부터 입사 내정 통보를 받았다. 졸업까지 1년3개월이나 남았지만 일본 내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디엔에이가 서둘러 채용에 나섰기 때문이다. 일본 재계단체인 게이단렌도 작년보다 2개월 이른 6월부터 회원 기업들이 내년 대학졸업예정자 채용 절차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에 따르면 작년 봄 일본 대졸자의 취업률은 72.6%로, 21년 만에 70%를 넘었다. 올봄엔 이를 크게 웃돌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기업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내고 있어서다. 일본 정부가 엔저(低)와 규제 완화로 기업을 지원한 가운데 엔고(高) 시련기를 극복한 일본 기업들이 개혁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가 일본 경제를 ‘잃어버린 20년’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다.
['잃어버린 20년' 벗어나는 일본] '속전속결' 아베노믹스…법인세 인하안 1주일 만에 내놔
['잃어버린 20년' 벗어나는 일본] '속전속결' 아베노믹스…법인세 인하안 1주일 만에 내놔
개혁에 나선 기업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장기불황의 원인으로는 1990년대 초반 주식·부동산 등 자산거품 붕괴와 일본 정부의 안일한 대응, 과도한 엔고로 인한 수출경쟁력 약화, 기업들의 혁신 부족 등 여러 요인이 꼽힌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소니 파나소닉 샤프 도시바 등 일본 전자업체들은 2000년대 들어 경쟁에서 밀리며 큰 홍역을 치렀다.

일본 장기불황 속에 생존한 기업들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분석이다. 2008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 적자(7800억엔)를 낸 히타치제작소는 가전 TV 디스플레이 사업을 접고, 철도·전력 등 인프라 중심의 기업 간 거래(B2B) 기업으로 변신했다. 파나소닉도 주택과 자동차부문에 집중해 2015회계연도(2015년 4월~2016년 3월)엔 8년 만에 최대 순이익을 예상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전인 2007회계연도에 비해 1조8000억엔의 원가를 절감한 도요타는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인 2조2500억엔의 순이익을 내다보고 있다. 일본 대표 기업들의 부활에 힘입어 도쿄증권거래소 토픽스지수 소속 1917개 상장사의 2015회계연도 순이익은 29조9550억엔(시장 전망치 평균)으로, 전년 대비 19.6% 증가할 전망이다. 2년 연속 역대 최대치 경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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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업의 실적 개선과 소득 및 고용 여건 개선이 일본 경제 회복을 견인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일본 대기업 임금인상률(2.59%)은 17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사카키바라 사다유키 게이단렌 회장은 NHK 신년인터뷰에서 “실적이 좋아진 기업은 작년을 웃도는 연봉 인상을 기대한다”며 올봄 노사임금 협상에서 임금인상 지침을 재확인했다.

기업 팍팍 밀어주는 일본 정부

아베노믹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일본 기업의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베 정부의 기업 밀어주기 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집권 초기부터 대규모 양적 완화를 통한 엔저 유도 정책으로 기업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아베노믹스의 세 번째 화살인 ‘성장 전략’에선 규제 개혁과 세금 인하 등으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경제특구에 한해 특정 산업에 대한 과감한 규제완화에 나서는 한편 개별 기업이 정부에 규제특례를 요청하면 검토를 거쳐 이를 허용하는 ‘기업맞춤형특례제도(기업실증특례)’를 도입했다. 최장 3년이었던 파견노동자의 파견기간 제한을 없애 노동시장의 유연성도 높였다. 지난해 1월 시행에 들어간 산업경쟁력강화법은 세제 혜택 등을 통해 업종 내 구조조정과 기업의 사업 재편을 촉진했다.

법인세 인하와 관련해선 2014년 6월 성장전략 발표 때 밝힌 ‘수년 내 20%대로 인하’ 방침이 적극적인 실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4년 말 일본 정부는 2015회계연도와 2016회계연도 실효세율을 각각 32.11%와 31.33%로 내리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세법개정안을 정하면서 올해 실효세율을 29.97%로 인하하기로 했다. 예정보다 일찍 30% 미만으로 내리기로 한 것이다. 아베 총리가 지난해 11월26일 경제계 인사들과의 ‘민관 대화’ 자리에서 재무성 등 관련 부처에 법인세를 20%대로 낮추라고 지시한 지 1주일 만에 정부 인하안이 나왔다.

새로운 먹거리 준비에 분주

기업과 일본 정부는 이제 새로운 ‘미래 먹거리’ 준비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일본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합병(M&A) 규모는 사상 최대인 10조엔을 넘었다. 과거 신흥국 내 현지 기업을 인수하면서 지갑을 열지 말지를 고민하던 모습은 대부분 사라졌다. 선진국 대기업에 대한 ‘통 큰’ 인수가 늘고 있다. 도쿄해상홀딩스와 메이지야스다생명보험은 각각 미국 손해보험사와 생명보험사를 수천억엔에 사들였다.

도요타는 이달 미국 실리콘밸리에 인공지능(AI)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도요타 리서치 인스티튜트’를 설립한다. 5년간 10억달러를 AI 분야에 투자해 자율주행차, 로봇 등 다양한 분야로 활용해 나갈 예정이다. 닛산자동차는 올해, 혼다는 2020년 고속도로용 자율주행차를 상용화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도 자율주행차, 로봇, 무인항공기(드론) 등을 신성장 산업으로 지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지난달 15일 국가전략특구자문회의에선 지바시와 기타큐슈시 등 4개 지방자치단체를 새로운 경제특구로 지정했다. 자율주행차 도로 시험과 드론 상용화를 위한 규제 완화, 간호 로봇 확산 등을 위해서다.

아베 총리는 “경제 효과가 큰 제안이 있으면 신속하게 대응하겠다”고 추가 특구지정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또 올해부터 5년간 AI와 빅데이터 분석, 로봇과 관련한 연구개발을 전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과학기술기본계획’도 마련했다. 신성장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용성 높은 연구와 기술 혁신을 위해 5년간 26조엔을 투자하기로 했다.

도쿄=서정환 특파원 ceose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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