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2004년 초 코스맥스 직원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로레알이라도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세계 1위 프랑스 화장품업체 로레알이 코스맥스를 찾아온 건 2년 전이다. 홍콩 박람회에서 코스맥스 제품을 보고 관심을 보였다. 한국 공장을 찾은 이들은 생산 설비 등을 살폈다. 비포장도로에서 장시간 배송해도 포장에 문제가 없는지, 열대지역에서도 변질되지 않는지까지 조사했다. 이렇게 2년이 지났지만 화장품 샘플만 주고받을 뿐 성과는 없었다.

직원들은 이경수 회장을 찾아갔다. “언제까지 로레알의 검사만 받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이 회장은 “다른 회사는 돈 주고 컨설팅도 받지 않습니까”라며 “우리는 공짜수업을 받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로레알의 테스트를 통과하면 글로벌 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으니 끝까지 가봅시다”며 직원들을 돌려보냈다.

화가나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해 말 코스맥스는 로레알과 공급 계약을 맺었다. 지금은 랑콤, 이브생로랑, 슈에무라 등 로레알의 7개 대표 브랜드 화장품을 제조한다. 2013년엔 로레알 인도네시아, 미국 공장을 차례로 인수했다. 로레알과 코스맥스의 신뢰는 두텁다. 이 회장은 “로레알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니 글로벌 회사로 성장해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업체들로부터 주문이 밀려들었다. 존슨앤드존슨,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외 300여개 브랜드가 코스맥스의 화장품을 가져다 팔고 있다. 로레알을 뚫은 비결에 대해 이 회장은 “위기는 항상 기회였고, 도전은 항상 특별한 보상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화가나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사치였다. 황해도 송화 출신인 이 회장은 다섯 살에 경북 포항으로 피난을 왔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돈을 잘 벌 수 있다고 해 서울대 약대에 진학했다. 그는 적응하지 못했다. 방황하다 베트남전쟁 참전을 지원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언제든 삶이 끝날 수 있는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생각했다. “이 상황을 견뎌내면 앞으로 못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제약의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영업을 하면서 이 회장은 큰 교훈을 얻었다. 그는 “약을 팔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영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그는 카피라이터 생활을 몇 년 하고, 대웅제약으로 자리를 옮겼다. 뛰어난 성과를 냈다. 이사로 발령받은 지 2년 뒤 상무로, 6개월 만에 전무로 승진했다. 잘나갔지만 뭔가 허전했다.

일본과 결별하다

어느 날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매형과 대화할 일이 있었다. 매형은 그에게 “직접 사업을 해보지”라고 했다. “아 그래, 내 사업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곧장 실행에 옮겼다. 우선 어떤 업종에 뛰어들지 조사했다. 화장품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국내 화장품시장에 브랜드 화장품 제조사들은 몇 개 있었다. 제조업자개발생산(ODM)업체는 2년 전 생긴 한국콜마뿐이었다. 수입 개방으로 글로벌 브랜드가 국내로 밀려 들어올 때였다.

일본으로 달려갔다.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서였다. 한국 진출을 검토하던 일본 2위 ODM업체 미로토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생산도 해보기 전인 1994년 미로토와 결별했다. 자체 기술력을 쌓기 위해 경험 많은 연구소장을 데려온 것이 문제였다. 미로토는 “우리가 제공하는 기술만 있으면 화장품을 충분히 제조할 수 있다. 왜 외부에서 사람을 영입하고 연구소를 세우느냐”고 항의했다. 짧게 보면 미로토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자체 기술을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회장은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오늘 이후 미로토와의 모든 관계를 끊겠다. ODM 기업의 생명은 기술력과 품질이다”고 선언했다.

다름을 추구하다

미로토와 결별한 뒤 연구개발(R&D)의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 화장품산업의 약점은 무엇일까. 스킨 등 기초 화장품은 강했다. 제조가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이다. 색조 화장품에 손대지 않은 것은 제조 과정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차별화한 색을 내야 해 창의성도 필요했다. 이 회장은 색조로 방향을 잡았다. 끈질긴 R&D를 통해 코스맥스는 마스카라, 아이섀도 등 색조시장의 강자가 됐다. 코스맥스 매출의 55%는 색조부문에서 나온다. 이 회장은 “미로토와의 결별을 계기로 원칙을 세우고 한 방향으로 달려온 것이 코스맥스가 색조시장의 강자로 클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말했다.

외환위기도 기회가 됐다. 당시 주요 고객사들은 부도 위기에 몰렸다. 화장품 원자재 가격은 뛴 데 반해 판매량은 급감했다. 이 회장은 임직원을 불러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원가 상승에 대한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공급 가격을 동결하자고 했다. 이전까지 정했던 최소 생산 수량도 없앴다. 손해를 보더라도 고객이 원하는 시기에 무조건 제품을 공급하기로 했다. 직원들은 반대했지만 밀어붙였다.

글로벌 기업의 길

로레알과 전략적 제휴를 맺은 비결도 신뢰였다. 이 회장은 “문제가 생기면 로레알에 솔직히 설명한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핵심 노하우인 재료, 배합 비율 등 제조기법도 모두 공개했다. 이런 협력을 통해 2년 걸리던 신제품 제조기간을 9개월로 줄일 수 있었다.

코스맥스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준비도 철저히 했다. 2004년 국내 화장품업체 최초로 중국 상하이에 공장을 세웠다. 이 회장은 미국에 진출하기 10여년 전부터 중국 시장을 눈여겨봤다. 중국 판매회사와 기술제휴도 해보며 시장을 탐색했다. “15년간 중국 시장을 철저히 분석하고 공략한 덕분에 중국 매출이 매년 평균 40%씩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중국 생산 능력을 대폭 확충하고 있다. 상하이엔 연간 2억개의 색조 화장품을 생산할 수 있는 제2공장을 짓고 있다. 2013년부터 가동 중인 광저우공장은 증축에 들어갔다.

■ 코스맥스는

젤 아이라이너 첫 개발...색조 화장품 '작은 거인'


[한계돌파] 끊임없는 R&D로 승부 거는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
코스맥스의 전신은 1992년 설립된 한국미로토다. 1994년 독자적인 기술 개발을 위해 관계를 끊고 사명을 바꿨다. 코스맥스는 2005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젤 아이라이너를 비롯해 아이섀도, 마스카라 등으로 색조부문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 세계 1위 로레알그룹의 랑콤, 이브생로랑, 슈에무라 등의 색조 화장품도 코스맥스가 만들고 있다. 미국과 중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지난해 수출액 6600만달러를 달성했다. 무역의 날 ‘50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 이경수 회장은

△1946년 황해도 송화 출생 △1970년 서울대 약학과 졸업 △1992년 대웅제약 전무 △1992년 코스맥스 설립 △2007년 대한화장품협회 이사 △2010년 무역의 날 대통령표창 수상 △2012년 로레알그룹 100대 협력사 선정 △2013년 로레알그룹 인도네시아, 미국 공장 인수 △2015년 무역의 날 은탑산업훈장 수상

김용준/김희경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