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은 신비로운 색깔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세상의 어떤 것을 태워도 결국은 모두 회색이 되고 만다. 이를 보더라도 회색은 세상 만물의 기원이자 그 궁극의 색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회색은 화합과 융화의 색이다. 그렇기에 회색은 어떤 색과도 다 잘 어울린다. 치마를 회색으로 하면 그 위에 어떤 색깔의 저고리를 배색해도 안 어울리는 색이 없다.
내가 회색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때 내 머릿속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열 살 무렵이었다. 거의 해마다 여름이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동화사에 가고는 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글씨를 쓰셨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먹을 갈거나 아버지가 글씨를 쓰시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 절에서의 풍경들이 아직 기억에 선하다.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와 마주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스님들의 모습. 아버지의 글씨에서 배어나던 먹물의 향기. 오래된 옛 절의 기와 빛깔. 그런 감각들이 내게 회색이라는 색에 대한 원초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준 것 같다.
처음부터 회색이 그렇게 다른 색과 조화를 잘 이룰 것이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미리 알고서 한 일이 아니었다. 내 인생에 일어난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나는 결과를 예상하고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이 결코 아니다. 그저 그 순간 내가 좋아서 미친 듯이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면 내가 전혀 생각도 못한 결과들이 일어났고, 다행스럽게도 그 결과 중에는 성공적인 것이 많았다.
회색의 발견 역시 내가 처음부터 어렸을 때의 그 먹물 색과 절의 빛깔을 기억해냈기 때문이 아니다. 회색으로 자꾸 이런저런 옷을 짓다 보니 어렸을 때의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아, 내 안에 이런 기억들이 숨어 있어서 어딘가에서 영향을 미치는구나’라고 깨닫게 됐을 뿐이다. 그 깊은 회색의 느낌. 먹물의 깊이와 향기, 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그 영원성이 색깔로 표현된 셈이라고나 할까.
내가 회색을 디자이너 이영희의 색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라는 사람이 이 색 속에 담겨진 깊은 의미를 닮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영희 < 메종 드 이영희 대표 leeyounghee@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