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정비원 원숭이학교 교장 "원숭이도 자신에 해되면 말 안들어…사람처럼 '체벌보다 칭찬' 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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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에서 '원숭이 선생님'으로…정비원 원숭이학교 교장
"영리한 원숭이의 기운 받아 올해 모든 일 순탄히 풀리길…"
"영리한 원숭이의 기운 받아 올해 모든 일 순탄히 풀리길…"
복싱 플라이급 '세계챔프' 실력파
가난 이기려 복싱…18년 선수 생활
1990년 은퇴…이벤트 사업 '실패'
일본서 원숭이 공연보고 3년간 교육
2002년 부안에 '원숭이학교' 열어
원숭이 IQ 50~60…2~3세 유아 수준
돌봄과 유대감 없으면 키울 수 없어
조직생활하는 원숭이와 친하려고 며칠씩 함께 먹고 자며 뒹굴기도
"동물학대 그만두라" 항의도 받아
“원숭이답게 살자.”
지난해 12월22일부터 오는 3월1일까지 경기 고양시 국제 꽃박람회 전시관에서 열리는 ‘원숭이학교 일산 스페셜 공연’ 무대에 붙어 있는 급훈이다. 학생들은 모두 원숭이다. 전북 부안 상서면에 있는 원숭이학교의 ‘원숭이 학생’ 중 18마리가 수도권에 올라와 ‘봉숭아 학당’을 떠오르게 하는 요절복통 코미디를 연출한다. 쓰메끼리, 반장, 토끼, 깔깔이, 맹구 등 원숭이의 이름도 독특하다.
“아이고, 이거 다 짜고 하는 건데 살살 좀 해라. 어, 저 놈 좀 보게. 목발 짚고 뛰어다니네. 재주도 좋아.” 붉은색 재킷을 입은 정비원 원숭이학교 교장(57)이 구수한 입담으로 산수와 장래희망 발표 등 수업을 하며 원숭이를 ‘지도’해보지만 개구쟁이 원숭이 학생들은 막무가내다. 옆 친구와 떠들기도 하고 중간에 오줌을 싸는가 하면, 자기 순서가 아닌데 나오는 원숭이도 있다. 그래도 그 모든 게 재미있는 ‘수업’ 풍경인 원숭이학교다.
붉은 원숭이해의 설 연휴를 앞둔 지난 2일 원숭이학교 일산 공연장을 찾았다. 방학 시즌이 끝난 평일이라 그런지 관객은 10여명뿐이었다. 정비원 교장은 “어린 학생들이 개학하고 난 평일이라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확 줄지는 몰랐다”며 “기운은 좀 빠지지만 그래도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웃었다.
가난 이기려 선택한 복싱
정 교장은 원래 프로복서 출신이다. 1986년 국제복싱연맹(IBF)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실력파였다.
복싱을 시작한 이유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서울 상도동에서 3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집안 형편이 어려운 탓에 가족이 전북 부안으로 이사해 중학교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제가 어렸을 땐 TV 방송에서 프로권투나 프로레슬링 중계를 많이 틀어줬어요. 그때 한국 최초로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된 김기수 선수의 경기를 봤죠. 그걸 보면서 ‘권투로 돈을 벌어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프로스포츠가 복싱이랑 레슬링밖에 없었는데, 제가 체격이 작다 보니 아무래도 복싱이 낫겠다 싶었거든요.”
1972년 입문한 복싱의 길은 험난했다. 아마추어 선수 시절엔 경기 참가비와 숙박비 등을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프로로 데뷔한 뒤에야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10㎞씩 뛰고, 시합 보름 전부터 체중 조절을 위해 칼같이 식단을 관리하는 게 일상이었다”며 “시합 직전엔 두 손이 덜덜 떨리며 긴장하지만 막상 링 위에 올라가면 오히려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와 대결한 선수 중엔 손오공이란 이름의 복서도 있었다. “저는 본명인데 그 친구는 별명이었어요. 시합 때 빼곤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하고 난 다음에 그 선수에 대해 묻는 사람이 가끔 있더군요. 제가 알기론 권투선수 생활을 오래 하진 않았다고 들었어요.”
1990년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 SBS에서 3년간 복싱 중계 해설을 하다가 복싱계를 떠났다.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해봤지만 홀로 운동만 해온 사람에게 사회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마침 전시 이벤트 사업을 하던 정 교장의 형 정희원 씨가 “나와 함께 일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사업의 길로 들어섰다.
원숭이에게서 본 ‘조직의 쓴맛’
정 교장은 형과 함께 보석과 공룡, 파충류 전시회 등 각종 이벤트 사업을 벌여나갔다. 처음엔 잘나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국내 전시 이벤트 시장은 매우 좁다”며 “하나가 새롭게 열리면 금방 후발주자들이 모방하기 때문에 1~2년도 안 돼 동반 몰락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선보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목마름에 시달리다가 1999년 일본에서 우연히 일본원숭이 단체공연단인 ‘닛코사루군단(日光猿軍團)’의 쇼를 관람했다. “그걸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2000년부터 3년 동안 닛코사루군단에서 원숭이 사육과 조련, 프로그램 등을 전수받았습니다. 모방을 막기 위해 2000년 ‘원숭이학교’ ‘원숭이유치원’ 등 원숭이 공연과 관련될 만한 모든 이름을 상표등록했어요.”
2002년 9월 전북 부안에 원숭이학교를 열었다. 정 교장은 “대도시 인근에 마련하고 싶었지만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이왕이면 내 ‘제2의 고향’인 부안에 짓고 싶었다”고 말했다. 초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별도 홍보를 하지 않았고 부안이 대중교통으로 오기 힘든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숭이학교를 찾는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렸다. “국내 최초로 원숭이 단체공연을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이는 게 당연했죠. 그런데 몇 년 지나니 인기가 조금씩 시들해졌습니다. 그래도 어린이와 학부모 관객이 꾸준히 찾아옵니다.”
원숭이학교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든 건 원숭이들과의 관계 형성이었다. 원숭이의 IQ는 50~60으로 사람으로 치자면 두세 살 유아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조직 생활을 하며 서열이 분명하고 사람과 별로 친해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길들이기도 어렵다. “초반엔 며칠씩 원숭이 우리에서 같이 먹고 잤습니다. 제가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하니까요. 그러고 나니 원숭이들이 저를 받아주더군요.”
원숭이 사이의 엄격한 조직 질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우리 학교 원숭이 중 제일 나이 많은 원숭이가 올해 서른다섯 살인데, 그 원숭이가 애지중지 키운 어린 원숭이가 커서 다른 조직의 대장에게 붙어 자신을 키워준 원숭이를 공격하는 걸 봤다”며 “동물 세계에서 나타나는 약육강식의 비정함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고 전했다.
원숭이와 함께해온 이야기를 하던 중 “동물학대인 공연을 그만두고 원숭이학교를 폐쇄하라”는 일부 동물보호단체의 최근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정 교장은 “그렇다면 말을 길들여야 하는 경마도 동물학대일 텐데 한국마사회에는 왜 따지지 않는지 궁금하다”며 “원숭이는 영리하기 때문에 돌봄과 유대감이 없으면 절대 오랫동안 키울 수 없고 공연을 위한 훈련도 불가능하다”고 항변했다.
“일본에서 원숭이 조련 교육을 받을 때도 ‘칭찬은 아홉 번, 체벌은 한 번만 하라’고 배웠습니다. 그 체벌도 절대 강하게 하면 안 된다고 했죠. 원숭이들은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느끼면 전혀 말을 듣지 않아요.”
“무슨 일이든 10년 이상 해야 속 알아”
정 교장은 “복서든, 원숭이학교 교장이든, 어떤 일을 하건 나란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며 “일할 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야 하며 적어도 10년 이상은 해야 속사정을 안다”고 말했다. “복싱선수로 18년을 살았고, 원숭이학교 교장으로 16년을 지내오고 있습니다. 뭘 하든 10년이 기점이더라고요. 그게 지나면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기고요.”
그는 “부인이 1968년 원숭이띠”라며 “요즘 ‘내 힘 많이 가져가라’며 응원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새해 소원이 뭐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저와 제 가족, 우리 원숭이학교 식구 모두 건강히 잘 지냈으면 하는 게 가장 큰 소망이죠.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렵더군요. 올해는 원숭이의 해인 만큼 더욱 순탄하게 잘살고 싶습니다.”
■ 각국서 본 원숭이의 상징성
중국, ‘길’한 동물 여겨…인도는 ‘경외의 대상’
이집트선 ‘지혜·정의의 신’
한국엔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 등 여러 국가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원숭이에게 ‘꾀 많고 민첩하며 사악함을 물리치는 존재’란 의미를 부여해왔다.
중국에선 원숭이를 매우 길한 동물이라고 여긴다. 고전소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이 이런 인식을 대표한다. 소설 속 손오공은 하늘과 땅을 오가며 신통력을 과시하고,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기 위해 기나긴 여행을 하는 삼장법사를 돕는 재기발랄하고 영특한 캐릭터다. 중국인 사이엔 “붉은 원숭이해에 낳은 아이는 재주가 많고 출세한다”는 속설도 있다.
인도에선 원숭이를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다. 거리에서 원숭이가 활보하거나 음식을 훔쳐 먹어도 아무도 원숭이를 향해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2500여년 전 나온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엔 원숭이 모습을 한 신 ‘하누만’이 등장한다. 하누만은 서사시의 주인공 라마에게 충성하며 끊임없이 그에게 헌신하고, 라마의 초능력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라마야나와 라마야나 속에 나온 원숭이신 하누만에 대한 신앙은 인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로도 퍼졌다.
고대 이집트에선 원숭이를 과학기술과 법, 문자를 주관하는 지혜와 정의의 신 ‘토트’의 화신(化身)이라 여겼다. 지금까지도 벽화와 조각품 등 각종 유물을 통해 이집트에서 원숭이가 토트 신으로서 추앙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선 다윈의 진화론 등장 이후 원숭이를 사람과 가장 비슷한 동물로서 여러 가지 주제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영화를 비롯한 예술작품에 인간의 조력자로도 자주 등장시킨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가난 이기려 복싱…18년 선수 생활
1990년 은퇴…이벤트 사업 '실패'
일본서 원숭이 공연보고 3년간 교육
2002년 부안에 '원숭이학교' 열어
원숭이 IQ 50~60…2~3세 유아 수준
돌봄과 유대감 없으면 키울 수 없어
조직생활하는 원숭이와 친하려고 며칠씩 함께 먹고 자며 뒹굴기도
"동물학대 그만두라" 항의도 받아
“원숭이답게 살자.”
지난해 12월22일부터 오는 3월1일까지 경기 고양시 국제 꽃박람회 전시관에서 열리는 ‘원숭이학교 일산 스페셜 공연’ 무대에 붙어 있는 급훈이다. 학생들은 모두 원숭이다. 전북 부안 상서면에 있는 원숭이학교의 ‘원숭이 학생’ 중 18마리가 수도권에 올라와 ‘봉숭아 학당’을 떠오르게 하는 요절복통 코미디를 연출한다. 쓰메끼리, 반장, 토끼, 깔깔이, 맹구 등 원숭이의 이름도 독특하다.
“아이고, 이거 다 짜고 하는 건데 살살 좀 해라. 어, 저 놈 좀 보게. 목발 짚고 뛰어다니네. 재주도 좋아.” 붉은색 재킷을 입은 정비원 원숭이학교 교장(57)이 구수한 입담으로 산수와 장래희망 발표 등 수업을 하며 원숭이를 ‘지도’해보지만 개구쟁이 원숭이 학생들은 막무가내다. 옆 친구와 떠들기도 하고 중간에 오줌을 싸는가 하면, 자기 순서가 아닌데 나오는 원숭이도 있다. 그래도 그 모든 게 재미있는 ‘수업’ 풍경인 원숭이학교다.
붉은 원숭이해의 설 연휴를 앞둔 지난 2일 원숭이학교 일산 공연장을 찾았다. 방학 시즌이 끝난 평일이라 그런지 관객은 10여명뿐이었다. 정비원 교장은 “어린 학생들이 개학하고 난 평일이라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확 줄지는 몰랐다”며 “기운은 좀 빠지지만 그래도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웃었다.
가난 이기려 선택한 복싱
정 교장은 원래 프로복서 출신이다. 1986년 국제복싱연맹(IBF)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실력파였다.
복싱을 시작한 이유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서울 상도동에서 3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집안 형편이 어려운 탓에 가족이 전북 부안으로 이사해 중학교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제가 어렸을 땐 TV 방송에서 프로권투나 프로레슬링 중계를 많이 틀어줬어요. 그때 한국 최초로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된 김기수 선수의 경기를 봤죠. 그걸 보면서 ‘권투로 돈을 벌어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프로스포츠가 복싱이랑 레슬링밖에 없었는데, 제가 체격이 작다 보니 아무래도 복싱이 낫겠다 싶었거든요.”
1972년 입문한 복싱의 길은 험난했다. 아마추어 선수 시절엔 경기 참가비와 숙박비 등을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프로로 데뷔한 뒤에야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10㎞씩 뛰고, 시합 보름 전부터 체중 조절을 위해 칼같이 식단을 관리하는 게 일상이었다”며 “시합 직전엔 두 손이 덜덜 떨리며 긴장하지만 막상 링 위에 올라가면 오히려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와 대결한 선수 중엔 손오공이란 이름의 복서도 있었다. “저는 본명인데 그 친구는 별명이었어요. 시합 때 빼곤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하고 난 다음에 그 선수에 대해 묻는 사람이 가끔 있더군요. 제가 알기론 권투선수 생활을 오래 하진 않았다고 들었어요.”
1990년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 SBS에서 3년간 복싱 중계 해설을 하다가 복싱계를 떠났다.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해봤지만 홀로 운동만 해온 사람에게 사회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마침 전시 이벤트 사업을 하던 정 교장의 형 정희원 씨가 “나와 함께 일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사업의 길로 들어섰다.
원숭이에게서 본 ‘조직의 쓴맛’
정 교장은 형과 함께 보석과 공룡, 파충류 전시회 등 각종 이벤트 사업을 벌여나갔다. 처음엔 잘나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국내 전시 이벤트 시장은 매우 좁다”며 “하나가 새롭게 열리면 금방 후발주자들이 모방하기 때문에 1~2년도 안 돼 동반 몰락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선보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목마름에 시달리다가 1999년 일본에서 우연히 일본원숭이 단체공연단인 ‘닛코사루군단(日光猿軍團)’의 쇼를 관람했다. “그걸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2000년부터 3년 동안 닛코사루군단에서 원숭이 사육과 조련, 프로그램 등을 전수받았습니다. 모방을 막기 위해 2000년 ‘원숭이학교’ ‘원숭이유치원’ 등 원숭이 공연과 관련될 만한 모든 이름을 상표등록했어요.”
2002년 9월 전북 부안에 원숭이학교를 열었다. 정 교장은 “대도시 인근에 마련하고 싶었지만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이왕이면 내 ‘제2의 고향’인 부안에 짓고 싶었다”고 말했다. 초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별도 홍보를 하지 않았고 부안이 대중교통으로 오기 힘든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숭이학교를 찾는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렸다. “국내 최초로 원숭이 단체공연을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이는 게 당연했죠. 그런데 몇 년 지나니 인기가 조금씩 시들해졌습니다. 그래도 어린이와 학부모 관객이 꾸준히 찾아옵니다.”
원숭이학교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든 건 원숭이들과의 관계 형성이었다. 원숭이의 IQ는 50~60으로 사람으로 치자면 두세 살 유아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조직 생활을 하며 서열이 분명하고 사람과 별로 친해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길들이기도 어렵다. “초반엔 며칠씩 원숭이 우리에서 같이 먹고 잤습니다. 제가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하니까요. 그러고 나니 원숭이들이 저를 받아주더군요.”
원숭이 사이의 엄격한 조직 질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우리 학교 원숭이 중 제일 나이 많은 원숭이가 올해 서른다섯 살인데, 그 원숭이가 애지중지 키운 어린 원숭이가 커서 다른 조직의 대장에게 붙어 자신을 키워준 원숭이를 공격하는 걸 봤다”며 “동물 세계에서 나타나는 약육강식의 비정함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고 전했다.
원숭이와 함께해온 이야기를 하던 중 “동물학대인 공연을 그만두고 원숭이학교를 폐쇄하라”는 일부 동물보호단체의 최근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정 교장은 “그렇다면 말을 길들여야 하는 경마도 동물학대일 텐데 한국마사회에는 왜 따지지 않는지 궁금하다”며 “원숭이는 영리하기 때문에 돌봄과 유대감이 없으면 절대 오랫동안 키울 수 없고 공연을 위한 훈련도 불가능하다”고 항변했다.
“일본에서 원숭이 조련 교육을 받을 때도 ‘칭찬은 아홉 번, 체벌은 한 번만 하라’고 배웠습니다. 그 체벌도 절대 강하게 하면 안 된다고 했죠. 원숭이들은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느끼면 전혀 말을 듣지 않아요.”
“무슨 일이든 10년 이상 해야 속 알아”
정 교장은 “복서든, 원숭이학교 교장이든, 어떤 일을 하건 나란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며 “일할 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야 하며 적어도 10년 이상은 해야 속사정을 안다”고 말했다. “복싱선수로 18년을 살았고, 원숭이학교 교장으로 16년을 지내오고 있습니다. 뭘 하든 10년이 기점이더라고요. 그게 지나면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기고요.”
그는 “부인이 1968년 원숭이띠”라며 “요즘 ‘내 힘 많이 가져가라’며 응원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새해 소원이 뭐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저와 제 가족, 우리 원숭이학교 식구 모두 건강히 잘 지냈으면 하는 게 가장 큰 소망이죠.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렵더군요. 올해는 원숭이의 해인 만큼 더욱 순탄하게 잘살고 싶습니다.”
■ 각국서 본 원숭이의 상징성
중국, ‘길’한 동물 여겨…인도는 ‘경외의 대상’
이집트선 ‘지혜·정의의 신’
한국엔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 등 여러 국가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원숭이에게 ‘꾀 많고 민첩하며 사악함을 물리치는 존재’란 의미를 부여해왔다.
중국에선 원숭이를 매우 길한 동물이라고 여긴다. 고전소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이 이런 인식을 대표한다. 소설 속 손오공은 하늘과 땅을 오가며 신통력을 과시하고,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기 위해 기나긴 여행을 하는 삼장법사를 돕는 재기발랄하고 영특한 캐릭터다. 중국인 사이엔 “붉은 원숭이해에 낳은 아이는 재주가 많고 출세한다”는 속설도 있다.
인도에선 원숭이를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다. 거리에서 원숭이가 활보하거나 음식을 훔쳐 먹어도 아무도 원숭이를 향해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2500여년 전 나온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엔 원숭이 모습을 한 신 ‘하누만’이 등장한다. 하누만은 서사시의 주인공 라마에게 충성하며 끊임없이 그에게 헌신하고, 라마의 초능력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라마야나와 라마야나 속에 나온 원숭이신 하누만에 대한 신앙은 인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로도 퍼졌다.
고대 이집트에선 원숭이를 과학기술과 법, 문자를 주관하는 지혜와 정의의 신 ‘토트’의 화신(化身)이라 여겼다. 지금까지도 벽화와 조각품 등 각종 유물을 통해 이집트에서 원숭이가 토트 신으로서 추앙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선 다윈의 진화론 등장 이후 원숭이를 사람과 가장 비슷한 동물로서 여러 가지 주제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영화를 비롯한 예술작품에 인간의 조력자로도 자주 등장시킨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