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콧대 높은 카네기홀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흥분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000년, 내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17년 동안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파리 패션계에서 인정받은 내가 드디어 세계 경제, 문화,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에 상륙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모든 예술인이 한 번쯤 서보기를 갈망하는 카네기홀 대극장에서 말이다. 카네기홀이 어떤 곳이던가. 에디트 피아프가 기립박수를 받았고, 비틀스와 롤링스톤스가 열정적인 무대를 펼친 곳이 아니던가.

한국전통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서 전통무용뿐 아니라 패션까지 함께 보여준다면 더욱 성공적인 행사가 될 것 같아 함께하기로 했다. 행사의 슬로건도 ‘Wind of History 한국문화 5천년’이었다. 쇼를 준비하며 2800석을 꽉 채울 일이 걱정됐지만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동분서주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계약조건이었다. 카네기홀 대여 기간은 고작 하루였고, 이 하루 동안 무대 준비와 리허설을 마쳐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카네기홀이 패션쇼를 열기에는 공간적 제약이 많다는 점이다. 주로 음악 공연을 하는 곳이다 보니 백스테이지 공간은 비좁았고 패션쇼 무대는 T자형이어야 하는데 이곳은 원형이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과 어려운 조건 속에서 준비를 마무리하고 마침내 막이 올랐다. 공연 내내 숨죽이고 있던 2800여명의 관객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한복의 선과 색에 감탄하고 놀라는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우리 한복이 세계 어디에 내놔도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카네기홀의 대접은 정말 홀대 그 자체였다. 그런 대접을 받는 순간 이상하게 오기가 발동했다. 그들을 더 놀라게 해줘야겠다는 각오와 더불어 더 멋진 쇼를 준비해 그들이 다시는 우리를 얕잡아보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감정이 솟구친 것이다. 그것을 애국심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세계 무대를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할 때마다 나를 추동시킨 힘은 그런 오기와 애국심이었다.

너무나 아찔하고 숨막히는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카네기홀 쇼가 없었다면 이후의 뉴욕 진출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커다란 자극을 준 2000년 6월30일의 카네기홀 쇼. 세계 패션계의 어느 누구도 카네기홀에서 패션쇼를 한적이 없었기에 나에게 최초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뒤따라 온 쇼로 지금 생각해도 아주 특별했다. 나는 우리 젊은 예술가들이 카네기홀을 그저 동경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자기의 무대로 삼기 위해 현실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이영희 < 메종 드 이영희 대표 leeyounghee@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