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지 약화된 산별노조...노동시장 변화의 바람 부나
산별노조는 같은 산업에서 일하는 모든 근로자를 하나의 노조로 조직한 형태다. 예를 들어 자동차산업 근로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금속노조에는 완성차업체와 부품업체 근로자들이 각각의 기업노조가 아닌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가입돼 있다. 산별노조는 개별기업 노조의 단순한 연합체가 아니라 법적으로 한 개의 노조다. 개별기업 노조는 산별노조의 지부와 지휘 역할을 한다. 국내 최대 노조인 현대자동차 노조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차지부’로 불린다. 그 아래에 울산공장지회, 아산공장지회, 전주공장지회 등 개별 공장 지회가 있다. 기업별 노조는 각사 노조가 단체협약 교섭·체결권을 갖지만 산별노조는 산별노조가 가진다.

대법원, 산별노조 독주에 ‘브레이크’

산별노조의 탄생은 기업·정부에 대한 노조원의 투쟁력을 높여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배경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 근로자 보호가 강한 유럽에선 산별노조가 일반적인 노조 형태다. 우리나라에선 1997년 노동조합법 개정으로 산별노조 결성이 가능해졌다. 산별노조의 대표적 권한은 단체협약 체결권과 쟁의권이다. 각 기업과의 단체협약 교섭을 각 지부·지회가 아닌 산별노조 집행부가 진행한다. 단체협약도 산별노조 명의로 체결한다. 산별노조 집행부가 회사와 체결한 단체협약은 원칙적으로 전 사업장에 적용된다. 교섭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파업 여부도 산별노조가 결정한다. 산별노조에 가입한 사업장의 파업을 총괄할 수 있기 때문에 전국 단위 대규모 투쟁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산별노조 집행부 결정에 따르지 않는 지부·지회를 징계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산별노조는 막강 파워를 과시한다.

대법원은 지난 19일 산업별 노조 산하 지부·지회가 어느 정도 독립성이 있다면 스스로 산별노조를 탈퇴해 기업노조로 전환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장 등이 ‘기업노조로 전환한 총회 결의를 무효로 해달라”며 발레오전장 노조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파기환송은 대법관 13명 중 8 대 5로 결정됐다. 대법원은 지부·지회가 산별노조 하부 조직이라는 원칙은 인정하면서도 “단체교섭·협약을 하지 못하더라도 근로자단체로서 독립적으로 의사를 결정할 능력을 갖췄다면 자주적·민주적 결의를 거쳐 조직을 선택하고 변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사용자와 직접 단체교섭·협약을 맺으며 기업노조 수준의 지위를 갖춰야 조직 전환이 가능하다는 기존 판례에서 조직 변경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입지 약화된 산별노조...노동시장 변화의 바람 부나
정치 투쟁 선동…‘노동귀족’ 지적도

산별노조가 결성된 초기에는 노조 미조직 사업장에서의 근로자 보호 강화, 교섭비용 감소 등의 순기능이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다. 근로자 권익 보호를 위한 정상적인 노동운동보다 노동운동만을 전문으로 하는 ‘노동귀족’이 생겨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기업별 현안보다는 정치 이슈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현장 근로자들의 참여가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산별노조 집행부의 단체교섭·파업 등 의사결정이 개별기업 경영 환경이나 근로자들의 사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르노삼성자동차나 만도 등 주요 자동차 기업에선 근로자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기업노조가 제1노조로서 단체협약 교섭·체결권을 갖고 있고 금속노조는 소수 노조에 머물러 있다. 한때 산별노조 중심이던 일본은 1950년대 대규모 노사분규 이후 기업노조가 대거 산별노조를 탈퇴했다. 기업별 노조는 종신고용, 연공서열 등과 함께 일본 노사관계의 ‘3종(種) 신기(神器)’로 불리며 1960년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낸 토대로 평가된다.

강성 노동운동 타격…노동개혁 계기 될 듯

이번 대법원 판결은 20년 가까이 계속된 산별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에 큰 변화를 예고한다. 양대 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반대로 노동개혁 입법이 무산된 상황에서 이번 판결은 ‘산업현장발(發) 노동개혁’의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동안 민주노총의 강경 투쟁에 반대하며 이를 소극적으로 따랐던 산하 지부·지회의 이탈이 예상된다. 전체 조합원의 80% 이상이 산별노조 소속인 민주노총으로선 존립 기반이 흔들릴 위기를 맞은 것이다.

산별노조 중심 노동운동이 약화되는 반면 기업별 노조 움직임은 활발해질 것이란 예상이다. 민주노총은 2014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개혁 논의를 시작한 뒤 단 한 번도 공식적인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장외투쟁으로 일관했다. 제2, 제3의 발레오전장이 나오기 시작하면 국내 노동운동의 틀이 바뀔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판결이 강력한 산별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을 개별 기업 중심의 실리 추구형 노동운동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강현우 기자 shin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