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의 점심 풍경은 그 시대 직장생활을 투영하는 자화상이다. 경기둔화로 돈 쓰기가 두려운 요즘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직장인들은 스스럼없이 ‘혼밥족(혼자서 밥 먹는 사람들)’으로 변신한다. ‘쿡방(음식을 주제로 한 방송 프로그램)’ 열풍의 시대에 ‘맛집 탐방’을 하며 점심시간을 보내는 샐러리맨도 많다. 한국 정보기술(IT)업계의 ‘메카’로 떠오른 경기 판교, 분당 일대에선 패밀리 레스토랑과 같은 구내식당에서 햄버거, 중식, 이탈리안 등 다양한 식사를 즐긴다.

6200원.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가 작년 말 발표한 ‘2016 대한민국 중산층 보고서’에 나오는 중산층의 하루 점심값이다. 얼마 되지 않는 이 돈으로 김과장, 이대리들은 생활 속의 작은 행복을 찾기 위해 오늘도 점심시간을 기다린다.
[김과장 & 이대리] '맛집 탐방' 유혹에 불어난 뱃살 빼려 샐러드 '혼밥'하며 헬스장서 강행군
가장 먼저 동나는 점심메뉴=샐러드

서울 광화문에 있는 A기업 본사 지하 구내식당은 점심에 한식 양식 등 대여섯 가지 메뉴를 제공한다. 요즘 가장 먼저 동나는 메뉴는 플라스틱으로 포장돼 들고 나가서 먹을 수 있는(테이크아웃) 샐러드다.

구내식당에 이 메뉴가 처음 등장한 건 2~3년 전이었다. 몸매관리에 신경 쓰는 여직원들의 요청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고 있다. 점심 혼밥족이 늘어나고 있어서다. 점심시간에 샐러드를 갖고 불 꺼진 사무실로 돌아와 각자 자리에서 여유있게 식사하는 혼밥족을 이 회사 곳곳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혼밥족 생활 3개월째라는 이 회사 총무팀 이 대리(32)는 “내근직이라는 특성상 온종일 얼굴 맞대고 사는 직장 선후배들과 점심시간까지 같이 보내고 싶지는 않다”며 “점심시간에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전날 보지 못한 TV 프로그램을 컴퓨터로 다시 보는 게 훨씬 좋다”고 말했다. 그는 “혼밥족이 된 데에는 경기둔화로 구조조정이다 뭐다 주변이 하도 뒤숭숭해 나도 모르게 허리를 졸라맨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인천 송도의 한 제약회사에 다니는 김 대리(31)에게도 점심시간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는 시간이 아니다. 그는 밥 먹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남는 시간에 혼자서 운동을 한다.

김 대리는 점심시간이 되면 남들보다 조금 일찍 회사 1층 식당에 간다. 푸드코트 형태의 식당에는 다양한 메뉴가 준비돼 있지만 김 대리는 늘 테이크아웃 코너에 가 김밥 등 간단한 메뉴를 챙긴다.

그러고는 곧바로 2층 헬스장으로 향해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한 뒤 사무실로 복귀한다. 때때로 날씨가 좋을 때는 송도신도시 일대를 자전거를 타고 돌기도 한다. “업무가 너무 많아 도저히 나만의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동료들과의 점심에 빠지는 게 꺼림칙할 때가 있지만 이렇게라도 내 몸을 챙겨야지요.”

혼밥족이 못마땅한 기성세대

젊은 직장인들의 이 같은 트렌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중장년층 세대도 있다. ‘중후장대(重厚長大) 업종’에 속한 한 대기업 본사의 인사 관련 부서에 근무 중인 김 부장(44)은 점심시간이 되면 부하직원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게 영 익숙하지 않다. 동기들끼리 식사하는 직원도 있고, 혼자 도시락을 먹거나 점심을 거르며 다이어트하는 직원도 있다.

“선약이 있다”며 사라지는 후배들은 그나마 낫다. “점심 같이 먹자”는 김 부장의 제안을 20대 후반~30대 초반 주니어 직원이 “점심시간에라도 혼자 있고 싶다”며 직설적으로 거절하는 때도 많다.

그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이 회사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중후장대 업종 특성상 더 그랬다. 부서원들은 점심시간마다 함께 모여 회사 근처 김치찌개집 등을 찾았다. 선배는 후배의 밥을 사주는 게 고유한 책무이자 특권이었다.

“심지어 입사한 지 1~2년밖에 안 된 막내 직원도 점심시간에 직장인을 위한 짧은 강좌를 듣는다며 같이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하더라고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요즘 어린 것들’을 지켜보는 김 부장의 한탄이다.

점심시간에 맛집 탐방

생활용품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디자이너 박 대리(33)는 다이어트를 위해 작년 말까지 1년간 식단을 조절했다. 아침식사는 요구르트와 바나나로 때우고 출근해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해결했다.

그랬던 박 대리에게 연초 인사이동으로 바로 위 과장이 바뀌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 과장은 구내식당이라면 치를 떠는 미식가였다. 여기에 최근 쿡방 열풍의 영향까지 받아 점심때만 되면 박 대리의 손을 잡아끌고서 회사 주변 맛집 탐방에 나섰다.

“다이어트 때문에 안 된다”는 박 대리의 애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 대리, 우리가 회사 왜 다녀. 점심 잘 먹으려고 다니는 거 아니야. 그 재미라도 없으면 회사생활 어떻게 해.”

박 대리는 이 과장의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다. “운동은 계속하고 있지만, 점심을 배부르게 먹으니 순식간에 3㎏이나 찌고 말았네요. 자꾸 피할 수도 없고 고민입니다.”

판교는 구내식당 경연장

글로벌 IT 기업인 구글의 미국 캘리포니아 본사 ‘구글플렉스’에는 구내식당이 11개 있다. 구글 직원은 물론 동행한 가족과 손님 등 모두에게 공짜로 호텔급 식사를 제공한다. 한식 중식 일식 이탈리안 태국식 등 세계 주요 음식을 한자리에서 모두 맛볼 수 있다. 구글 측은 “공짜 식사에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공짜 식사를 제공하면, 그들은 엄청난 것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많은 한국 기업이 구글의 이 같은 정책에 영향 받아 구내식당을 고급화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NHN엔터테인먼트, NC소프트, 구글코리아 등 IT 기업이 몰려 있는 판교 벤처밸리는 ‘구내식당의 경연장’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곳의 한 IT 기업에서 일하는 최 과장(35)은 “푸드코트 형태로 돼 있는 구내식당에 한식, 일식, 중식, 이탈리안 등이 모두 마련돼 있다”며 “점심때 밖에서 먹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현재 결혼을 준비 중인 여자친구가 있는 최 과장은 여자친구와 구내식당 데이트를 즐긴 적도 많다. “업무 관계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다 보니 분당에 사는 여자친구가 퇴근하면서 잠깐 회사에 들른 적이 많아요. 구내식당이 여자친구에게 선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어서 자주 데이트를 했지요.”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