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황학동 주방거리의 한 대형 주방용품업체가 고의로 부도를 내 줄 돈은 덜 주고 받을 돈은 다 받아 챙기는 방식으로 거래처에 30억원 상당의 피해를 입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업체가 부도 후에도 같은 장소에서 간판만 바꿔 달고 영업을 계속하고 있어 상인들의 추가 피해가 우려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고의부도 의혹을 받고 있는 A종합주방은 1997년 설립 이래 황학동에서 주방기구용품 제조·판매업, 주방설비업 등을 하면서 50개 이상의 거래처를 두고 있는 업체다. 2014년 11월 부도 이후 A사가 있던 자리에서 현재는 B종합주방과 K모 회사가 영업을 하고 있다. B종합주방은 부도난 A사의 대표와 그의 전 부인 등이 A사 부도 4개월 전인 2014년 7월 새로 만든 회사다. K사의 대표는 A사 대표의 전 부인이 맡고 있다.

한 피해업체 관계자는 “A종합주방이 부도 후 물품 대금을 지급해야 할 거래처에는 ‘부도가 났으니 대금을 원가의 30%만 지급하겠다’라며 대금을 적게 주고, 물품 대금을 받아야 할 거래처에는 ‘B사와 K사가 A종합주방과 같은 업체니 그쪽으로 돈을 보내면 된다’며 공급한 물품 대금 100%를 다 받아챙겼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피해를 입은 업체가 50여곳, 피해 금액이 3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피해 상인들은 2014년 11월의 부도가 고의적으로 기획됐다고 보고 있다. A사가 부도 직전 7월에 주방기구용품 제조·판매업과 주방설비업 등 기존 회사와 똑같은 일을 하는 새 법인 B사를 만들고 치밀하게 기존 회사의 재산 등을 정리해나갔다는 정황에 따른 것이다. A사는 2014년 9월 입점 건물주와 맺은 임차계약을 해지한 뒤 B사 이름으로 같은 장소에 다시 임대차 계약을 했다. 10월엔 A사 회사 차량 3대의 명의를 B사로 이전하고, A사가 가입한 보험을 해지한 뒤 환급금을 현금으로 인출했다. 하지만 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거래처에 12월을 만기로 하는 어음을 발행하면서 물품을 공급받아왔다. 피해업체 관계자는 “사실상 지급 의사가 없는 어음을 주면서 물품만 받아챙긴 셈”이라고 말했다.

부도가 상습적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A종합주방은 2002년 1차 부도를 겪었다. 지역 상인들에 따르면 2010년엔 ‘부도위기’라는 말로 거래처를 꾀었다. “부도가 나면 거래처는 한 푼도 받을 수 없는데, 어떻게든 대금의 30~40%라도 지급할테니 그것만이라도 받고 합의하는 게 어떠냐”며 지급할 금액을 줄였다는 설명이다.

몇몇 거래업체들은 2014년 11월 A사 관계자들을 사기와 강제집행면탈죄로 고소하고 현재 관련 법적 절차를 진행 중이다. 피해업체의 한 관계자는 “고의부도로 물품대금을 깎는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부도덕한 행위가 더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회사가 이 같은 행위를 수차례 반복했지만 잘 드러나지 않은 건 상인들의 복잡한 속사정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유통업계에서는 상당수 업체들이 세금을 아끼기 위해 암묵적으로 세금계산서를 발행하지 않고 하는 ‘무자료 거래’를 하고 있다. A사와 무자료 거래를 한 상인들은 피해를 입었다고 법적 분쟁으로 갔다가 자칫 자신의 탈세 혐의까지 드러날까 두려워 쉽게 법적 대응에 나서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A사는 거래 상대방도 약점을 가진 상태임을 악용해 간판만 바꿔 버젓이 영업하면서도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A사 관계자는 “고의부도 의혹 등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법정에서 사실이 밝혀질 것이므로 법적 절차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