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의 절치부심 덕분일까. 그는 독특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인간 군상으로 사회 부조리를 자연스럽게 투영하는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여기가 집이다’(2013년) ‘환도열차’(2014년) ‘미국아버지’(2014년) ‘햇빛샤워’(2015년) 등의 작품은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호평받았다. 특히 ‘여기가 집이다’ ‘햇빛샤워’로 온갖 연극상을 휩쓸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가 하고 있는 것에 비해 과대평가 받는 느낌이에요. 어렸을 때 경험한 선배들의 작업은 훨씬 더 깊었죠. 다만 이야기를 중시하면서도 그걸 추상인 단계까지 끌고 가려는 균형감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주목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환도열차’ 재공연(22일~4월17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준비에 한창이다. 이 작품은 1953년 피란민을 태우고 부산에서 출발한 환도열차가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14년 서울에 불시착한다는 기발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남편을 찾기 위해 열차에 탔다가 미래에 떨어진 지순의 눈을 통해 ‘과거에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세상이 과연 지금의 모습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그는 2014년 초연 대본을 좀 더 다듬어 최대한 군더더기를 덜어냈다고 했다. 초연 때 3시간에 달하던 공연시간을 20분가량 줄였고, 특별조사관 제이슨 등 일부 캐릭터도 좀 더 공감 가도록 수정했다. “초연 때의 지순이 가진 정서는 ‘환멸’이었어요. 인간성은 사라지고 성과중심주의로 흘러가는 세상에 대해서요.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는 게 최선인가에 대한 물음에 의문이 남았어요. 그래서 환멸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좀 더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사회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이끌어낸다. 달동네 사람들에게 연탄을 나눠주는 순진한 청년 동교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백화점 매장 직원 광자를 통해 비틀린 삶의 양상을 보여주는 연극 ‘햇빛샤워’가 대표적이다.
그는 “연극은 사회의 물결 속에서 의미 있는 뭔가를 건져올리는 ‘그릇’”이라며 “연극인에게 세상이란 밭을 누빌 시간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가 한때 연극계를 떠나 도금공장에 다니고, 택시기사도 하고, 지방 방송사 작가를 하며 세상을 떠돈 이유다. “이번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 중에는 새벽에 계단 청소를 하는 친구도 있어요. 작품을 위해 그만두라고는 못 하고 대신 ‘페이스 조절만 잘하라’고 했습니다. 연극은 기교만 가지고는 할 수 없어요. 무언가 담을 게 없다면 허망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