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깜빡이' 켠 기업들…위기탈출 페달 밟는다
지난 2일 재계는 깜짝 놀랐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그룹 회장직에서 전격적으로 물러나겠다고 밝힌 것이다. 박 회장은 2일 (주)두산 이사회에서 “그룹 회장직을 승계할 때가 됐다”며 차기 이사회 의장으로 박정원 (주)두산 지주부문 회장을 추천했다. 박 회장은 2012년 4월 취임해 약 4년간 그룹을 이끌어왔다.

재계 일각에서는 박 회장의 용퇴가 두산인프라코어 등 주요 계열사의 실적악화 등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 나왔다. 이날 두산은 두산인프라코어의 공작기계부문을 1조500억원에 사모펀드 MBK에 매각했다.

다음날인 3일에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상선의 등기이사와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상선은 용선료 삭감, 채무 재조정, 자산 매각 등의 자구안을 추진 중이다. 현대상선은 “고강도 추가 자구안이 보다 중립적인 이사회의 의사결정을 통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결단”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오너 경영인의 전격적인 퇴진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기업의 경영 상황을 대변한다.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오너가 책임 경영에 나선 회사도 많다. SK(주)는 오는 18일 주주총회에서 최태원 회장을 등기이사로 새로 선임할 계획이다. 최 회장의 사촌형인 최신원 SKC 회장도 SK네트웍스 사내이사를 맡는다. 구본준 (주)LG 부회장은 18일 LG화학 주주총회에서 기타 비상무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기업들은 최고경영진 교체뿐 아니라 인력과 조직 구조조정, 인수합병(M&A), 신사업 추진 등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지난해 기업들은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M&A를 통한 선제적 사업재편을 활발히 벌였다.

삼성은 지난해 초 삼성토탈, 삼성종합화학,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 등 화학·방위산업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했다. 하반기에는 삼성SDI의 케미컬 부문과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을 롯데그룹에 넘겼다. 롯데그룹은 삼성의 화학 계열사를 인수했고 한화는 삼성의 화학 및 방산 계열사를 사들이며 주력사업을 강화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해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를 합병했다. SK그룹에서도 SK텔레콤은 CJ헬로비전을, SK(주)는 OCI머티리얼즈를 인수했다.

올해 기업들은 M&A와 함께 신사업 발굴을 통해 불황을 이겨 나간다는 각오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30대 그룹은 올해 122조7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이는 지난해 116조6000억원보다 5% 이상 늘어난 액수다. 분야별로 보면 시설투자는 작년 실적보다 7.1% 증가한 91조원, 연구개발(R&D)투자는 전년과 비슷한 32조원으로 추정됐다. 전경련은 “대기업이 어려운 국내외 경제 여건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유통, 에너지 등 기존 주력 업종과 신사업에 과감하게 설비투자를 하고 이와 함께 신성장동력 개발을 위한 R&D에도 자금을 집중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설명했다.

삼성은 지난해 공사를 시작한 경기 평택 반도체단지 건설에 2018년까지 15조6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친환경 및 스마트 차량 개발에 2018년까지 13조3000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SK그룹은 올해 SK하이닉스가 설비 투자로 5조5000억원, SK텔레콤은 망 투자에 1조3000억원, SK브로드밴드는 인프라 투자에 65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LG그룹은 LG디스플레이의 파주 OLED 생산설비 투자에 2018년까지 10조원, 마곡 사이언스파크에 2020년까지 4조원 규모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