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미국의 민주주의
프랑스 혁명은 처음부터 미국 민주주의를 베낀 것이었다. 토머스 페인 같은 선동가들이 대륙으로 건너와 열심히 봉기의 불을 지폈다. 프랑스에서는 민중의 정치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 그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혁명은 대중의 열기 위로 제멋대로 붕붕 떠다닌 끝에 나폴레옹 같은 혁명정신의 입법자, 즉 독재자를 만들어내는 역설을 낳았다. 민중은 언제나 운명적으로 자신과 동일시되는 독재적 지도자를 만들어낸다. 개인이 없는 군중은 언제나 독재의 불쏘시개만 될 뿐이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독일에 짓밟힐 때까지 그렇게 100년을 민중주의에 지배당했다. 왜 프랑스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답한 것이 유명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다. 장발장이 빵을 훔치고 자베르가 그를 추적하던 시절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지레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공화적 요소, 즉 절제와 시민적 덕목, 개인주의,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겸양, 이민사회적 가치 등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미국 언론만으로는 트럼프를 이해하기 어렵다. 언론은 트럼프가 곧 무너질 것처럼 묘사한다. 그런데 매번 이기고 있다. 갈수록 강해진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트럼프를 보면서 무솔리니를 회고하는 글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최근에는 나치즘과 비교하는 논평도 등장한다. 나치즘이라니! 그러나 씨앗은 뿌려졌고 자라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가 점차 대중독재로 전락해가는 것을 알려주는 전조요 지표일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주장은 간단명료하다. 무언가 미국 아닌 것이 우리 속에 섞여 들어와 미국을 타락시키고 파국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이민자들이 경제를 망친다는 것, 자유무역으로 승자와 패자가 생기는데 미국이 바로 그 패자라는 것, 월가가 서민의 부를 착취하고 있다는 것, 중국 등이 미국을 파탄으로 몰고가는 음모를 꾸미고 있고, 국내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의 하수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주장들은 모든 조악한 정치이론의 공통된 줄거리다. 한국의 좌익그룹이 전개하는 논리와도 흡사하다. 욕설로 점철되는 상스러움도 그렇다. 일부러 교양있는 단어를 피하는 어법은 마치 진실을 폭로하는 명제인 것처럼 추종자들을 열광시킨다. 정청래와 진중권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폭로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면에서 그리고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도를 우회한다는 점에서 트럼프 현상은 한때의 ‘노빠 현상’과도 비슷하다. 법과 제도를 우회해 직접 대중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모든 민중주의의 특징이다. 정치는 갑자기 살맛나고, 숨겨져온 위선이 벗겨지고, 진실이 막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폭력에 대한 암시도 그렇다. 처음에는 가벼운 이죽거림에 그쳤지만 “폭동!” 같은 단어들의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특징들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파시즘에서 관찰됐던 것과 유사하다. 트럼프주의는 놀랍게도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좌익 성향의 정치 운동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있다. 그런 운동은 기필코 극단주의적 경향성을 갖게 된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헌법 속에서 태어났다. 1차대전 피해의식과 그것에 대한 민족적 분노는 대중독재의 에너지로 쌓여갔다. 1920년대 말의 대공황은 혁명적 에너지를 히틀러에게 공급했다. 그런 환경에 비기면 지금의 미국 경제사정은 너무도 온화하다. 실업률은 5%조차 밑돈다. 그런데도 트럼프가 먹히고 있다. 과장된 비주류적 감성이 트럼프의 에너지원(源)일 것이다. 급진적인 정책, 음모론, 상스런 욕설, 폭로주의, 시장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금기어를 부정하는 언어들, 제도 정치에 대한 불만 등이 트럼프의 정치적 자산이다. 그것이 반드시 이번은 아닐지 몰라도 어느 순간 미국의 전면적인 힘이 될 수도 있다. 급진 사회주의자 샌더스도 본질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바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