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서 수의학 전공하다 사진작가로
귀국 후엔 가수로 '파란만장한 삶'
아내·딸과 신촌 원룸서 소박하게 생활
아이 생기고 '현실적인 히피'로 변했죠
한국서 음악하는 건 고생스러운 일
나는 운이 좋은 사람…무대 다시 설 것
‘한국 포크의 전설’ 한씨의 별칭은 ‘영원한 히피’다. 그 감수성은 여전하지만, 지금 그가 서 있는 위치는 히피와 생활인 사이의 어디쯤이다. 금지곡을 부른 가수로 찍혀 비탄 어린 심정으로 비행기를 타던 예전의 모습은 이제 희미해졌다. 대신 자리를 채운 것은 ‘가장(家長) 한대수’의 모습이다. 계기는 2007년 양호의 탄생이다. 올해 아홉 살 난 딸 생각에 고민이 늘고, 고민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지난 7일 그가 내놓은 신간 에세이 바람아, 불어라에 나라의 미래 먹거리, 군 입대, 교육 문제 등 다양한 이슈가 담긴 이유다.
지난 23일 서울 창천동 인근 중국집과 자택에서 만난 한씨는 근황과 자신이 겪어온 한국 사회에 대한 감상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물”
그의 에세이에는 유독 ‘돈’ 얘기가 많이 나온다. ‘음악가는 돈 얘기를 하고, 사업가는 음악 얘기를 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하며 수입에 예민한 음악가의 얘기를 꺼내고, 저성장 시대의 대비책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개인에게는 신용카드와 자동차를 없애고 지출을 줄이라는 구체적인 조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맞아요. 돈 얘기가 많이 나오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데 돈 얘기를 안할 수 없죠. 특히 양호가 태어나면서 뼈저리게 느꼈어요. 산후조리원에 예방주사에…. 전부 돈이었거든요.”
그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은 담담하다. 돈이 없어서 고달프다는 것도, 돈 많은 이들에 대한 질시가 섞인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돈’에 대해 쓰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돈은) 없어도 문제고, 너무 많아도 고생이죠. 돈 모으기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나갈 덴 참 많잖아요. 아끼고 또 아끼는 방법밖에 없지요. 내가 특별히 돈 얘기를 많이 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사회가 돈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물’이에요.”
그는 “국내에 고학력자가 너무 많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해외에서는 반드시 공부할 사람만 대학교에 가는데, 국내는 대학 졸업자·박사가 너무 많아요. 이래서는 나라가 발전을 못 합니다. 돈 낭비에 시간 낭비예요. 애들한테 물어봐요. 공부가 정말 원하는 길인지.”
전부 ‘눈치 문화’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려줬다. 박영주 이건창호 회장의 조카인 그는 “돈 많은 기업인과 접촉할 일이 많았다”고 했다.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은 검소하게 살며 남 눈치를 안 보는데, 오히려 어중간하게 돈이 있고 열등감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럭셔리’에 열광해요. 열등감이 가득한 거예요. 내가 누구를 심판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런 게 보입니다.”
“사진도 찍고 칼럼도 쓰지만 나는 음악가”
그는 1948년 3월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촉망받는 핵물리학자였던 한창석 씨,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박정자 씨다.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난 아버지가 실종되는 아픔을 겪었다.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일곱 살 때부터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할아버지는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세대를 설립해 초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낸 한영교 박사다. 열 살 때이던 1958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당시 미국 초등학교에 대한 기억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60명 중에 30등 정도 했어요. 내 위로 ‘양호’한 애들, 밑으로 ‘양호하지 않은’ 애들이 있었던 셈이죠. 하하하.” ‘좋다’는 것을 ‘양호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한씨 특유의 화법이다. “그런데 미국 초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해서는 계속 1등을 했어요.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너무 시킨 거죠. 초등학교에선 천천히 가야 하는데. 무슨 공부를 그렇게 많이 시켜요?”
양호에게 학교에서 보는 ‘받아쓰기 시험’ 문제를 가르쳐 주면서 다시 한 번 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살림이 넉넉지 않아 뉴욕 맨해튼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브루클린이나 퀸스에라도 살기 위해 집을 알아보고 있는 이유다. 뉴욕에서는 양호가 다문화에 적응하는 법도 체득하기 쉬울 거라고 했다. 방 정리를 하던 옥사나 씨는 “6월1일이 양호 생일이자 24번째 결혼기념일”이라며 “양호 친구들에게 인사하는 문제도 있고 해서, 그 이후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씨는 1961년 한국에 돌아와 경남고를 다니다가 1965년 아버지가 실종 17년 만에 발견되자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뉴햄프셔대에서 수의학을 전공하던 그는 1966년 뉴욕 사진학교에 입학, 사진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국내에 들어와 포크송을 부른 것은 1968년이다. 이후 ‘세시봉’에서 데뷔한 뒤 이름을 알렸다.
지금까지 사진전은 두 번 열었다. 다음 사진전을 준비 중이다. 그간 낸 정규 음반은 13장이다. “정규 교육을 받은 사진은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한 음악을 하느라 할 시간이 없어요. 음악가·사진·칼럼니스트·작가…. 나를 부르는 말이 많지만 나는 음악가예요.”
데이비드 보위 죽음에 자극…5월 리메이크 앨범
1974년 1집 앨범 ‘멀고 먼 길’을 낸 뒤 42년이 흘렀다. ‘음악가’로 자신을 규정한 말마따나 그의 음악 인생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오는 5월14일 CD, 7월 LP로 새로 녹음한 리메이크 음반을 낼 계획이다. 10년 만에 내는 정규앨범이다. ‘물 좀 주소’ ‘사랑인지’ ‘고무신’ 등 1~2집 앨범 히트곡과 이혼의 아픔을 겪은 뒤 작업한 3집에서 뽑아낸 ‘이프 유 원트 미 투’ 등을 수록했다. 고전 팝인 ‘아 유 론섬 투나잇’과 ‘그린 그래스 오브 홈’도 담았다. 한상원과 신윤철, 이우창, 남궁연, 하치 등 후배 음악가와 함께 작업했다. 지난 1월 영국 록의 전설 데이비드 보위 사망 소식을 듣고 나서 리메이크 앨범을 내자는 제의를 수락했다.
1975년 발매한 2집 ‘고무신’이 체제 전복을 꾀한다는 이유로 음원이 소각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며 국내에서 잊힌 그를 재조명한 곳은 일본이다. 1997년 후쿠오카 공연에서 인기를 끌자 국내에서도 2집 복각판이 나왔다. 그 고마움을 담아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던 사카모토 규의 ‘스키야키’도 이번 앨범에 담았다.
최근 각광받는 ‘한류’에 대해 그는 부정적이다. “싸이는 정말 대단한 가수예요. 그는 진짜입니다. 하지만 ‘한류’라는 건 없어요. 허구예요. 스키야키도 빌보드 차트에 올랐지만 J팝이 미국 시장을 지배한 건 아니잖아요. 미국과 유럽 애들이 정말 시간을 내서 듣고, 돈을 쓰는 음악이 뭔지 살펴보고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요.”
한씨는 음악가로 한국에서 산다는 것이 보통 고생스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가 후배 음악가, 록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어린 음악 꿈나무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재능에 냉정해지라고 조언하는 까닭이다. “국내에서 대중음악만 해서 먹고 사는 사람 있어요? 록이나 포크는 미국에서 2000만명이 넘는 팬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20만명도 안 돼요. 그중에서 홍대클럽 음악을 듣는 사람은 10만명도 안 될 거예요. 도박 같은 길이지요.” 그 ‘도박 같은 길’을 걸어온 인생에 대해 그는 “운이 따라 줘서 가수로 살아왔다”며 “이만하면 양호한 것 아니냐”고 웃음을 지었다.
"녹록지 않은 청춘이라도, 터닝포인트 분명히 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다.”
젊은 세대에 조언을 부탁하자 한대수 씨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인생에는 ‘터닝 포인트(전환점)’가 분명히 있다”고 했다. “나만 해도 일본에서 시작한 제2의 전성기, 상상도 못 했어요.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그는 1997년 자신을 다시 가수로 무대에 서게 한 일본 후쿠오카 공연 실황을 실은 앨범과 2집 고무신 복각판을 담아 ‘1975 고무신 서울~1997 후쿠오카 라이브’를 1999년 발표했다.
젊은이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기록을 남기라는 충고도 했다. 지난 1월 타계한 영국의 록스타 데이비드 보위는 그보다 한 살 더 많다. 한씨는 보위의 사망 소식에 허무함을 느꼈다고 했다. 새 앨범을 내자는 제의를 선선히 수락한 이유다. “보위는 전설입니다. 젊었을 때 온 세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는데 죽으니 참 허무하더라고요. 인간은 다 죽어요. 하지만 음악은 영원하잖아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남긴다는 것이 참 가치가 있는 거죠.”
러시아 출신 아내 옥사나와 결혼해 딸 양호를 낳아 키우면서 각별해진 다문화가정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다문화·다인종에 대한 사회의 이해가 넓어지는 게 중요해요.” 연극인 손숙 씨와 함께 다문화 가족을 초청해 방송을 한 적도 있다. 그는 “굳이 이사할 장소로 뉴욕을 택한 것도 다양한 문화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어서입니다. 인종과 문화가 다양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양호가 하루빨리 그런 환경에서 컸으면 좋겠어요.”
글=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
사진=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