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선암사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정호승 ‘선암사’)
순천 조계산 선암사(仙巖寺)에 가면 울고 싶어지는 것은 이 시 때문일까, 누구나 함지박만 하게 이고 사는 근심 때문일까. 정호승 시인이 직접 밝힌 시작(詩作)의 계기가 와닿는다. 시인이 선암사에 갔다 볼일이 급해 부랴부랴 해우소(解憂所)에 들었을 때 본 글귀가 마치 부처님 품속 같더란다. “대소변을 몸밖으로 버리듯 번뇌와 망상도 미련없이 버리세요.” 그는 강의할 때마다 ‘깐뒤(뒷간)’란 간판이 붙은 이 해우소 사진부터 보여준다.
천년고찰 선암사는 백제 성왕 5년(527년) 아도 화상이 창건한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왕 원전(861년) 도선국사가 재건하고, 고려 선종 9년(1092년) 의천 대각국사가 크게 중건했다고 한다. 국내에 6개뿐인 불교 총림(叢林) 중 태고종 유일의 총림이 선암사다. 총림은 참선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이다. 조계종에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등 5곳이 있다.
선암사는 정유재란 때 모든 전각이 불탔으나 숙종 2년(1698년) 약휴대사가 중창불사를 마무리했다. 화재가 잦은 이유가 산강수약(山强水弱)의 지세 탓으로 여겨 한때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로 개명해 불렀다. 지금도 전각마다 환기창에 ‘물 수(水), 바다 해(海)’ 등 물에 관한 한자를 투각한 것을 볼 수 있다.
선암사에 가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게 참 많다. 초입 차밭의 은은한 차향은 추사 김정희도 매료됐다. 추사는 ‘다반향초(茶半香初)’라는 편액을 선암사에 남겼다. 400년 된 무지개다리 승선교(昇仙橋)와 생뚱맞은 장승, 100여점의 탱화, 청매화 고목, 무량수전 앞 생불(生佛) 노송도 있다.
꼭 가볼 곳이 해우소다. 근심을 풀라는 해우소 아닌가. 시인 정일근은 “내 몸의 작은 뒷문 하나 열지 못하고, 단 몇 푼의 근심조차 내버리지 못한 채 선암사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 뉘우친다”(‘선암사 뒷간에서 뉘우치다’)고 고백했다.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펑펑 울다보면 풀지 못할 근심은 없을 듯하다. 그래도 마음속 티끌 같은 근심이 남는다면 그냥 숙명이라 여겨 안고 가시라.
선암사의 ‘박하분 뒤집어쓴’ 듯한 매화는 주말이면 질 듯하다. 그러면 또 어떤가. 벚꽃이라도 화들짝 피지 않겠나.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순천 조계산 선암사(仙巖寺)에 가면 울고 싶어지는 것은 이 시 때문일까, 누구나 함지박만 하게 이고 사는 근심 때문일까. 정호승 시인이 직접 밝힌 시작(詩作)의 계기가 와닿는다. 시인이 선암사에 갔다 볼일이 급해 부랴부랴 해우소(解憂所)에 들었을 때 본 글귀가 마치 부처님 품속 같더란다. “대소변을 몸밖으로 버리듯 번뇌와 망상도 미련없이 버리세요.” 그는 강의할 때마다 ‘깐뒤(뒷간)’란 간판이 붙은 이 해우소 사진부터 보여준다.
천년고찰 선암사는 백제 성왕 5년(527년) 아도 화상이 창건한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왕 원전(861년) 도선국사가 재건하고, 고려 선종 9년(1092년) 의천 대각국사가 크게 중건했다고 한다. 국내에 6개뿐인 불교 총림(叢林) 중 태고종 유일의 총림이 선암사다. 총림은 참선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이다. 조계종에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등 5곳이 있다.
선암사는 정유재란 때 모든 전각이 불탔으나 숙종 2년(1698년) 약휴대사가 중창불사를 마무리했다. 화재가 잦은 이유가 산강수약(山强水弱)의 지세 탓으로 여겨 한때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로 개명해 불렀다. 지금도 전각마다 환기창에 ‘물 수(水), 바다 해(海)’ 등 물에 관한 한자를 투각한 것을 볼 수 있다.
선암사에 가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게 참 많다. 초입 차밭의 은은한 차향은 추사 김정희도 매료됐다. 추사는 ‘다반향초(茶半香初)’라는 편액을 선암사에 남겼다. 400년 된 무지개다리 승선교(昇仙橋)와 생뚱맞은 장승, 100여점의 탱화, 청매화 고목, 무량수전 앞 생불(生佛) 노송도 있다.
꼭 가볼 곳이 해우소다. 근심을 풀라는 해우소 아닌가. 시인 정일근은 “내 몸의 작은 뒷문 하나 열지 못하고, 단 몇 푼의 근심조차 내버리지 못한 채 선암사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 뉘우친다”(‘선암사 뒷간에서 뉘우치다’)고 고백했다.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펑펑 울다보면 풀지 못할 근심은 없을 듯하다. 그래도 마음속 티끌 같은 근심이 남는다면 그냥 숙명이라 여겨 안고 가시라.
선암사의 ‘박하분 뒤집어쓴’ 듯한 매화는 주말이면 질 듯하다. 그러면 또 어떤가. 벚꽃이라도 화들짝 피지 않겠나.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