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빛 투성이의 카샨 시가지
흙빛 투성이의 카샨 시가지
축복의 땅 에스파한

에스파한은 이란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오래전부터 산에서 물을 끌어다가 ‘카레즈’라는 지하 수로를 이용해 공급하는 방식으로 도시와 마을이 형성된 이란의 다른 지역과 달리 에스파한은 도시 가운데로 강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기 때문이다.

[여행의 향기] 아름다운 궁전·모스크·다리…"세상의 절반이 에스파한에 있다"
테헤란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인 17세기 사파비드 왕조의 압바스 1세는 에스파한을 수도로 삼았다. 그는 손재주가 좋은 북부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궁전과 일곱 가지 색깔의 타일로 장식된 모스크, 자얀데루드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건축했다. 그 뛰어난 건축미는 에스파한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 놨고 사람들은 “세상의 절반이 에스파한에 있다”고 말해왔다.

이슬람이 국교가 된 6세기부터 모스크는 페르시아 건축사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무슬림의 성전이자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쉼터인 모스크는 17세기 에스파한에만 162개나 건설됐을 정도로 건축이 활기를 띠었다.

전통 카페에서 물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전통 카페에서 물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에스파한의 수많은 모스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셰이크 루트폴라(Sheikh Lutfollah) 모스크, 알리가푸(Ali Quapu) 궁전 등과 함께 이맘 광장에 있는 이맘(Emam) 모스크다. 도시 중앙의 드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맘 광장과 그 주변의 건축물들. 원래 이름은 ‘낙셰자헌’인데 이슬람혁명 이후 이맘광장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일반인들의 휴식처가 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이 광장은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인데 그 주변에 정교하게 장식된 높이 40m의 미나렛과 돔이 돋보이는 모스크와 궁전, 전통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사파비드 왕조 시대의 주목할 만한 또 다른 건축물은 자얀데루드 강을 가로지르는 13개의 다리다. 그중에서 에스파한 사람들이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하주(Khaju)와 시오세폴(Sio Seh Pole)이다.

특히 ‘33개의 아치가 있는 다리’라는 뜻을 가진 시오세폴은 길이가 300m에 폭이 14m나 되며 하주 다리와 마찬가지로 댐의 역할까지 겸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그 많은 아치마다 불이 켜지는 저녁 무렵 외관의 아름다움을 보면 별일 없이도 그 다리 위를 걷고 싶어진다.

순교자들의 장미

이란의 도시 어딜 가나 거의가 ‘골레스톤 에 쇼하다’라는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은 ‘순교자들의 장미’라는 이름으로 이란-이라크 전쟁 때 전사한 사람들의 무덤이 몰려 있는 곳인데, 에스파한에도 시내 한 쪽에 자리하고 있다. 묘비에는 전사자들의 사진이 박혀 있는데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는 것으로 봐서 전선에서 싸우다 죽은 군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한다. 대부분 이라크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사망한 선량한 시민들이다. 묘비 수가 수천은 될 것 같은데, 큰 도시마다 이만큼의 희생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에스파한 사람 누구 하나 이 묘지에 연고가 없는 사람이 없어 묘지를 찾아 애도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슬람권은 민족에 따라 아랍 이슬람과 페르시아 이슬람으로 나뉜다고 한다. 흔히 중동이라고 부르는 아라비아반도 일대가 아랍 이슬람이고, 이곳 이란이 페르시아 이슬람이다. 이 두 민족은 일단 외모가 좀 다르다. 얼른 식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아랍족은 눈빛이 좀 서늘하고 얼굴선이 굵직한 반면, 이란 사람들은 이들보다는 좀 더 동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아라비아반도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떠돌이들이 오늘날 아랍인들이고, 자신들은 페르시아제국의 후예임을 자부하며 그들과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란 사람들이다. 이란은 21개 중동 국가들이 결성한 아랍동맹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항상 외톨이 왕따 신세다.

중세의 시간 속에 머물고 있는 야즈드

소금사막과 모래사막 사이에 있는 ‘야즈드’는 여름에 기온이 40도를 넘는 뜨거운 곳으로, 그 옛날 에스파한, 시라즈, 케르만 등에서 오는 대상(隊商)들의 집결지였다. 시내 중앙에 있어서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아미르 차크막’ 타워에 올라가 야즈드를 보니 시내 전체가 온통 흙빛이다. 사막에서 부는 강한 모래바람 때문인지 사막과 도시의 경계도 없어 보인다. 모스크의 돔과 뾰쪽한 미나렛만이 ‘페르시안 블루’로 빛나면서 사막의 보석이 되고 있다.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다른 도시에서는 흔하지 않은 이들의 위대한 발명품인 윈드타워(wind tower)가 보이기 시작한다. 윈드타워는 사방으로 구멍이 뚫린 네모난 굴뚝이다. 집 안에서 밖으로 연기를 내 뿜는 굴뚝이 아니라 집 밖을 지나는 바람을 잡아 집 안으로 내려 보내는 장치다. 사방에 바람받이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 바람이 걸리면 이를 집안으로 내려오게 해서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바람이 떨어지는 바로 아래에 수조를 만들어 놓으면 더욱 시원한 공기를 공급해 주기 때문에 그야말로 무공해 천연 에어컨인 셈이다. 한줄기의 바람이라도 잡아서 더위를 이겨내려는 이곳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야즈드는 이란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중심부로, 세계에서 보기 드문 조로아스터교 신전과 유적이 남아있다. ‘불의 신전’인 아타슈카다(Atashkadah), ‘침묵의 탑’인 다크메에(Dakhme-ye)다. 이슬람의 기세에 눌려 신도 수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신앙을 지키는 신도들이 상당수다.

아타슈카다의 꺼지지 않는 불

불의 신전인 아타슈카다는 영원히 타는 성스러운 불꽃이라는 의미다. 세계 각지의 조로아스터교 신도들이 470년 이후 한 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불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다. 신전 입구 중앙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프라바하르가 새겨져 있다.

이는 긴 날개가 달린 조류인간인데 선량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영혼을 고양시킨다는 의미다.

기원전 500년 무렵의 페르시아 문화를 대표하는 페르세폴리스의 곳곳에도 프라바하르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봐서 조로아스터교의 역사가 아주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란 사람들은 대부분 이슬람을 믿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알게 모르게 조로아스터교 방식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마치 한국인들의 정서 밑바닥에는 아직도 불교, 또는 정령 신앙이 깔려있는 것처럼.

성전에 들어가면 1500년 이전부터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신비스러운 불이 화로에 담겨 활활 타고 있는 것을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다. 상징적인 불이 아니라 진짜 장작더미에 불이 타는 성화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 속의 문구가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늘 좋은 생각을 가지고 바른말과 올바른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현명한 사람은 신(아후라마즈다)의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조로아스터교는 과거 특이한 장례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일정한 장소로 옮겨놓고 새들이 쪼아 먹도록 하는 것이다. 일명 조장(鳥葬)이다. 야즈드에서 이런 조장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 변두리에 있는 두 붉은색 산 정상에 망루처럼 세워진 ‘다크메에(Dakhme-ye)’, 즉 침묵의 탑이다.

두 침묵의 탑이 서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데 한 곳은 남성을, 다른 한 곳은 여성을 위한 곳이다. 1970년대 들어 이란 정부가 그런 풍습을 금지해서 지금은 텅 빈 자리만 남아있다. 흙먼지 날리는 가파른 길을 올라 조장터에 서니 아무것도 없는데도 어째 좀 으스스한 생각이 든다. 광활한 사막과 상주들의 숙소로 쓰였던 황토빛 건물들의 잔해. 이 삭막한 풍경 속의 침묵의 탑. 독수리들은 이제 날아오지 않지만 그 무거운 분위기에 삶과 죽음, 종교에 대해서 누구라도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시(詩)의 향기 은은한 시라즈

이란 북쪽에 있는 카라트 지역 유목민들이 젖을 짜는 모습
이란 북쪽에 있는 카라트 지역 유목민들이 젖을 짜는 모습
“5월에 시라즈를 방문하는 사람은 고향이 어디인지조차 잊을 것이다.” 유명한 시인 사디(Sadi)는 이렇게 극찬했다. 해발 1486m 고원에 있는 시라즈는 4000년의 긴 역사를 지닌 고도이자 잔드(Zand) 왕조가 페르시아를 다스리던 1753년부터 1794년까지 이 나라의 수도였다. 바킬사원을 비롯한 당시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천년 동안 지방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면서 가꾸어 온 정원의 도시이기도 하다. 페르시안 블루로 빛나는 모스크의 돔 형태가 다른 지역에 비해 개성적이고, 모스크 내부의 현란한 유리 장식이 돋보인다. 또 가는 곳마다 활기찬 전통 바자르가 있어 ‘페르시아의 시장’이라는 음악 속에 빠져드는 듯한 분위기가 여행자들의 기분을 들뜨게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이란의 대표적 시인 사디와 하페즈의 시향이 묻어나는 곳이다.

14세기 궁정시인 하페즈를 기리는 공원엔 가족끼리 연인끼리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다. 장미꽃을 한 송이씩 들고 와 대리석 무덤에 엄숙한 표정으로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페즈의 시가 새겨진 대리석 관을 어루만지면서 애통한 듯 소리 내어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란인들은 시를 사랑하며, 이란인이라면 누구나 시 한 구절을 외우고 수시로 낭독할 줄 안다고 한다.

아무리 유명해도 그렇지 7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의 시를 사랑하고 눈물을 흘려가며 낭송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이란 사람들은 하페즈의 시를 코란 못지않은 삶의 지침서로 여긴다고 한다.
페르세폴리스 유적에 있는 호마상
페르세폴리스 유적에 있는 호마상
제국의 역사를 찾아서-페르세폴리스

시라즈 시내에서 50㎞쯤 떨어진 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의 수도’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페르시아 유적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기원전 550년부터 330년까지 고대 페르시아를 다스렸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봄 궁전으로 건축된 페르세폴리스는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성벽처럼 둘러싸인 벽면을 따라 난 넓은 돌계단을 오르니 그 옛날 페르시아 제국의 문이 열렸다. 기원전 518년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을 처음 명령한 왕은 다리우스(Darius) 1세였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은 여름 궁전을 하그마탄(지금의 하마단)에, 겨울 궁전을 수사(Susa)에 두고 있었다.

총면적이 12만5000㎡에 달하는 페르세폴리스를 짓는 대공사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공격했던 기원전 330년까지도 끝이 나지 않았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들이 북적거렸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자리해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의 문물이 화려한 조각과 거대한 기둥들로 떠받혀 있는 ‘전 세계의 문’을 통해 유입되면서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그러다 보니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됐다.

페리세폴리스의 운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 마케도니아의 20대 청년 알렉산더는 이 놀라운 아시아의 번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다리우스 3세는 카스피해 연안까지 쫓기다 포로가 됐고, 자신을 체포한 병사로부터 한 모금의 물을 받아 마신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원전 330년 7월, 막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 페르시아의 대제국도, 화려한 페르세폴리스도 그렇게 기나긴 망각의 역사 속으로 묻혀 갔다.

▶▶여행정보

출발 전에 입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 이란 현지인을 알고 있다면 테헤란 공항에서 도착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비자 신청 때 여성은 머리에 스카프를 쓴 사진을 준비해야 한다.

시차는 4시간30분. 이란의 화폐 단위는 ‘리알’, 한국돈 1000원은 약 2만5000리알이다. 현지에서는 리알 대신 ‘토만’을 많이 쓰고 있으며, 10리알이 1토만이다.

직항은 없으며 베이징이나 방콕, 홍콩, 또는 쿠알라룸푸르를 거치거나 두바이나 카타르 도하를 거쳐서 갈 수 있다. 대한항공과 이란항공이 직항편을 마련할 예정이다. 겨울엔 춥고 흐린 날이 많고, 여름엔 너무 뜨거워 한낮에는 돌아다닐 수 없다. 4~5월이나 9~10월이 여행 최적기다.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여성은 히잡을 해야 한다. 검정 차도르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적어도 머리는 스카프로 가려야 한다.

박하선 여행작가 hotsunny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