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년간 연극계를 떠나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학생들이 ‘알바’하듯 하루하루 먹고살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정신은 늘 고여 있는 느낌이었고요. 혼자 멈춰 있었는데, 후배들이 극단 76단 40주년이니 작품을 해보자고 하더군요. ‘리어의 역(役)’은 그렇게 빛을 보게 된 작품입니다.”

"연극계 떠나 '알바'로 버틴 4년…신작 들고 돌아왔죠"
극단 76단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기국서 연출가(사진)의 말이다. 76단이 올해 창단 4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을 잇달아 무대에 올린다. 기 예술감독의 ‘리어의 역’, 박근형 극단 골목길 대표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김낙형 극단 죽죽 대표의 ‘붉은 매미’ 등 신작 3편이다.

76단은 1976년 기 예술감독과 배우 기주봉 형제, 무용평론가 김태원, 송승환 PMC프러덕션 대표 등이 창단했다. 부조리극 중심의 실험극 운동을 표방했다. 극단 이름은 창단 연도에서 따왔다. 76단이 젊고 패기 있는 극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국내 초연하면서였다. 줄거리와 무대장치도 없었고, 관객에게 욕하고 물을 뿌리는 등 말 그대로 ‘관객 모독’이었다. 젊은 관객들은 열광했다. 이후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리어왕’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험적인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오는 6월17~18일 경기 이천아트홀에서 공연하는 극단 76단의 대표작 ‘관객모독’. 76단 제공
오는 6월17~18일 경기 이천아트홀에서 공연하는 극단 76단의 대표작 ‘관객모독’. 76단 제공
하지만 2012년 ‘햄릿6-삼양동 국회 옆에서’를 끝으로 76단의 신작을 볼 수 없었다. 레퍼토리 공연인 ‘관객모독’만 꾸준히 무대에 올렸을 뿐이다.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기 예술감독이 슬럼프에 빠졌다. 그는 그 시절을 “풍랑의 바다에 표류하는 난파선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연극계를 떠났고, 생활은 더 나빠졌다.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이윤택 예술감독이 “1970년대 전위연극을 이끌던 기국서는 요즘 생계 유지를 위해 노동을 하고 있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인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76단 출신으로, 한국 연극계의 중견으로 성장한 박 대표와 김 대표가 함께 40주년을 기념하자고 나선 이유다.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르는 ‘리어의 역’(4월20일~5월8일 선돌극장, 6월1~5일 게릴라극장)은 기 예술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창작극이다. 리어왕 역할만 30년 한 배우가 있다. 그가 치매에 걸려 은퇴하자 국가는 그의 이름으로 극장을 짓는다. 그는 무대 바로 밑에서 유폐된 생활을 한다. 그에게 30년간 주인공과 함께 광대 역할을 해온 배우가 찾아온다. 두 배우는 리어와 광대의 역할극을 시작하고, 셰익스피어 원작 속 대사와 극 중 주인공의 삶이 겹쳐지면서 유희는 광폭해진다는 내용이다.

박 대표의 ‘죽이 되든, 밥이 되든’(5월18~29일 게릴라극장)은 모진 풍파를 겪은 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가 자식들과 떠난 마지막 순례길을 그린 작품이다. 순례 도중 폐허가 된 극장에서 이들은 인생과 예술에 대한 정담을 나누게 된다. 김 대표의 ‘붉은 매미’(6월8~12일 게릴라극장)는 경마장에서 만난 세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사회의 허와 실, 그 속에서 망가진 한 개인, 망상과 불확실로 가득한 그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본다. 3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