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의 정치가 뭐길래] 새누리, 천막당사 정신 어디가고…
2004년 3월23일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은 서울 잠실 학생실내체육관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새 대표에 박근혜 의원을 선출했다.

박 의원은 수락연설에서 “힘들다고 휘어지거나 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쳐 당을 반드시 살려내겠다”며 “당이 겪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현 당사에 들어가지 않고 천막을 쳐서라도 당장 당사를 옮기겠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은 당시 검찰의 2002년 대선 자금 수사로 촉발된 이른바 ‘차떼기 정당’으로 몰려 존립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휘청거렸다.

취재를 했던 기자를 포함한 한나라당 출입기자, 의원, 당직자들은 박 대표의 ‘천막을 쳐서라도…’라는 발언에 크게 주목 하지 않았다. 당장 구체적인 ‘행동’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당으로부터 “내일 아침 이사를 할 예정이니 보따리를 싸라”는 통보를 받았다. 박 신임 대표가 당장 천막을 쳐서라도 당사를 옮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당직자들은 그날 밤을 꼬박 새워 여의도 공원 길건너 공터(지금 서울국제금융센터 자리)에 컨테이너와 천막으로 당 사무실과 기자실 등을 급조했다.

3월 여의도 바람은 거셌다. 봄이 다가왔지만 야외의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천막 틈새로 황사 바람이 들어와 당직자들과 기자들은 코감기로 고생했다. 야외 간이 화장실이 설치됐지만 이용하기 불편해 인근 증권사 건물에 가서 볼 일을 보기도 했다.

한나라당 의원과 당직자들은 대부분 2004년 4월 17총선에서 100석도 건지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천막당사를 설치하고 박 대표의 전국 유세 덕분에 총선에서 예상보다 수십석 많은 121석을 건졌다. 원내 1당이 된 열린우리당에 30석이 적었지만 한나라당은 오히려 이겼다는 분위기였다. 박 대표는 한나라당을 수렁에서 건져 내 ‘박다르크(박근혜+잔다르크),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이후 ‘천막정신’은 어려울 때 당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의 견본으로 여겨졌다.

12년이 지나 새누리당은 이번 20대 총선에서 패배했다. 이번엔 17대 총선보다 딱 한석 많은 122석을 얻었다. 과반 의석을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가 참패해서 그런지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다.

당내에선 ‘천막당사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이 적지 않게 제기된다. 실무 당직자들은 부글 부글 끓고있다. ‘천막당사 정신’은 고사하고 당이 비상대책위원장 등 자리를 두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이 와해 직전이지만 구심점도 없고, 변화의지도 실종됐다는 것이다. 선거 참패 뒤 지도부부터 평의원까지 모두 반성을 외쳤으나 행동은 “네탓” 공방, 계파 지분싸움만 보여주고 있다.

대선주자들이 줄줄이 타격을 입어 정권 재창출이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으나 대책을 마련할 움직임 조차 없다. 그 흔하던 소장파들은 다 어디가고 2004년 거세게 불었던 정풍운동 목소리도 없다.

김기현 울산시장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제2의 천막당사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김 시장은 “밤을 꼬박 샜다. 안개에 쌓인 도시를 보면서 민심의 바다와 그 바다 위에 뜬 배를 생각했다”며 “재주복주(載舟覆舟),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이 서슬처럼 다가온 밤이었다”고 했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