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남자친구가 괴물로 변해도…경찰이 할 수 있는 건 경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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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데이트 폭력 8000건 육박
연인 간 폭행·살인 늘고 있지만 현행법상 격리·체포 힘들어
스토킹도 벌금 10만원에 그쳐
영국, 가정폭력 전과 기록 공개…미국은 신고 들어오면 바로 체포
"데이트 폭력 방지법 통과 시급"
연인 간 폭행·살인 늘고 있지만 현행법상 격리·체포 힘들어
스토킹도 벌금 10만원에 그쳐
영국, 가정폭력 전과 기록 공개…미국은 신고 들어오면 바로 체포
"데이트 폭력 방지법 통과 시급"
“헤어진 남자 친구가 다시 만나주지 않으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해요.”
2014년 말 대구에 사는 여성이 다급하게 112로 신고 전화를 걸었다. 경찰은 즉시 현장에 출동했다. 다행스럽게 전 남자 친구의 폭행이나 방화 등은 없었다. 경찰관은 전 남자 친구에게 “더 이상 여성을 괴롭히지 마라”고 훈계한 뒤 현장을 떠났다. 이후로도 며칠 동안 피해 여성의 신고가 여섯 차례 이어지자 경찰은 전 남자 친구를 파출소로 임의동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현행법은 격리나 접근 금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며칠 뒤 전 남자 친구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살해됐다. 지난 12일에도 서울 방배동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30대 여성이 “동거 중인 남자 친구가 때린다”고 신고하자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이 여성은 남자 친구에게 목이 졸려 살해됐다.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데이트 폭력’이 상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해 데이트 폭력 발생 건수는 7692건. 이 가운데 살인은 102건, 성폭행·추행은 509건에 달했다. 살인이나 성폭행 등 중대 범죄로 이어지기 전에 112 신고로 위험 신호가 나타나는 데도 사고를 막지 못하고 있다. 올 들어 3월까지 벌어진 데이트 폭력 사건은 199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큰 폭으로 늘었다.
경찰 “현장 출동해도 손 못 써”
데이트 폭력은 재범 비중이 매우 높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05년부터 10년 동안 연인 간 살인, 성폭력, 폭행, 상해 등 네 가지 범죄사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 중 76.6%가 이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처벌을 받은 적이 있는 전과자였다. 신고가 접수됐을 때부터 적극적인 예방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현장 경찰관들은 현행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경찰관이 현장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에 한계가 많다는 얘기다. 경찰관직무집행법(경집법) 4조는 술 취한 사람이나 정신착란을 일으킨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재산에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현장 경찰관들이 신고를 받고 출동해 보면 이미 상황이 끝난 뒤가 많아 현행범으로 체포하기 어렵고 가해자가 술에 취해 있거나 명백한 정신착란 상태가 아니면 적절한 격리 조치를 취하기도 힘들다”며 “대구 도끼살인 사건에서 경찰이 경고나 설득 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형법에는 데이트 폭력에 대한 규정도 없다.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지속적 괴롭힘’을 적용해 범칙금을 부과할 수 있는 정도다. 스토커에게 부과되는 벌금은 고작 10만원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의된 데이트 폭력 관련 법안들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지난해 2월 발의된 ‘스토킹 범죄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올 2월 발의된 ‘데이트 폭력 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 법안들은 스토킹 범죄자에 대한 형사처벌(스토킹 방지법)과 데이트 폭력 가해자에 대한 격리조치 및 정신상담·치료를 통한 범죄 예방(데이트 폭력 방지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달가량 남은 19대 국회가 이대로 끝나면 법안들은 자동 폐기된다.
데이트 폭력 예방에 적극적인 선진국
한국에서는 잠재 가해자에 대한 인권을 중시하는 반면 미국, 영국 등에선 데이트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경찰의 적극적인 조치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데이트 폭력 신고가 들어오면 가해자는 무조건 경찰에 체포된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아무런 조치 없이 철수하면 연인 사이에 또다시 폭력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토킹에 대한 예방 조치도 즉각적이다. 스토킹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현장에서 피의자를 격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판사에게 ‘긴급보호명령’을 요구할 수 있다. 판사의 보호명령을 어길 경우 스토커는 곧바로 경찰에 체포된다.
영국은 연인의 폭력 전과를 조회할 수 있는 가정폭력전과 공개제도를 통해 데이트 범죄를 예방하고 있다. ‘클레어법’으로 불리는 이 제도는 2009년 영국 여성 클레어 우드가 폭력 전과자였던 파트너에게 살해당한 뒤 제정됐다. 전과 공개는 전담 경찰관의 면담을 거친 뒤 신중하게 이뤄지도록 해 인권 침해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데이트 범죄 가해자에게 72시간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다. 72시간 동안 피해자가 있는 곳에 가해자가 접근하면 곧바로 경찰에 체포된다. 경찰이 가해자를 구속했다가 풀어줄 경우에도 재판 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까이 갈 수 없도록 조건부 석방 조치를 내린다.
이성용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선진국들은 가해자의 인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데이트 폭력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제재규정을 마련하고 있다”며 “한국도 데이트 폭력 예방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환/박상용 기자 jung@hankyung.com
2014년 말 대구에 사는 여성이 다급하게 112로 신고 전화를 걸었다. 경찰은 즉시 현장에 출동했다. 다행스럽게 전 남자 친구의 폭행이나 방화 등은 없었다. 경찰관은 전 남자 친구에게 “더 이상 여성을 괴롭히지 마라”고 훈계한 뒤 현장을 떠났다. 이후로도 며칠 동안 피해 여성의 신고가 여섯 차례 이어지자 경찰은 전 남자 친구를 파출소로 임의동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현행법은 격리나 접근 금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며칠 뒤 전 남자 친구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살해됐다. 지난 12일에도 서울 방배동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30대 여성이 “동거 중인 남자 친구가 때린다”고 신고하자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이 여성은 남자 친구에게 목이 졸려 살해됐다.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데이트 폭력’이 상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해 데이트 폭력 발생 건수는 7692건. 이 가운데 살인은 102건, 성폭행·추행은 509건에 달했다. 살인이나 성폭행 등 중대 범죄로 이어지기 전에 112 신고로 위험 신호가 나타나는 데도 사고를 막지 못하고 있다. 올 들어 3월까지 벌어진 데이트 폭력 사건은 199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큰 폭으로 늘었다.
경찰 “현장 출동해도 손 못 써”
데이트 폭력은 재범 비중이 매우 높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05년부터 10년 동안 연인 간 살인, 성폭력, 폭행, 상해 등 네 가지 범죄사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 중 76.6%가 이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처벌을 받은 적이 있는 전과자였다. 신고가 접수됐을 때부터 적극적인 예방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현장 경찰관들은 현행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경찰관이 현장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에 한계가 많다는 얘기다. 경찰관직무집행법(경집법) 4조는 술 취한 사람이나 정신착란을 일으킨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재산에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현장 경찰관들이 신고를 받고 출동해 보면 이미 상황이 끝난 뒤가 많아 현행범으로 체포하기 어렵고 가해자가 술에 취해 있거나 명백한 정신착란 상태가 아니면 적절한 격리 조치를 취하기도 힘들다”며 “대구 도끼살인 사건에서 경찰이 경고나 설득 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형법에는 데이트 폭력에 대한 규정도 없다.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지속적 괴롭힘’을 적용해 범칙금을 부과할 수 있는 정도다. 스토커에게 부과되는 벌금은 고작 10만원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의된 데이트 폭력 관련 법안들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지난해 2월 발의된 ‘스토킹 범죄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올 2월 발의된 ‘데이트 폭력 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 법안들은 스토킹 범죄자에 대한 형사처벌(스토킹 방지법)과 데이트 폭력 가해자에 대한 격리조치 및 정신상담·치료를 통한 범죄 예방(데이트 폭력 방지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달가량 남은 19대 국회가 이대로 끝나면 법안들은 자동 폐기된다.
데이트 폭력 예방에 적극적인 선진국
한국에서는 잠재 가해자에 대한 인권을 중시하는 반면 미국, 영국 등에선 데이트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경찰의 적극적인 조치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데이트 폭력 신고가 들어오면 가해자는 무조건 경찰에 체포된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아무런 조치 없이 철수하면 연인 사이에 또다시 폭력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토킹에 대한 예방 조치도 즉각적이다. 스토킹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현장에서 피의자를 격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판사에게 ‘긴급보호명령’을 요구할 수 있다. 판사의 보호명령을 어길 경우 스토커는 곧바로 경찰에 체포된다.
영국은 연인의 폭력 전과를 조회할 수 있는 가정폭력전과 공개제도를 통해 데이트 범죄를 예방하고 있다. ‘클레어법’으로 불리는 이 제도는 2009년 영국 여성 클레어 우드가 폭력 전과자였던 파트너에게 살해당한 뒤 제정됐다. 전과 공개는 전담 경찰관의 면담을 거친 뒤 신중하게 이뤄지도록 해 인권 침해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데이트 범죄 가해자에게 72시간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다. 72시간 동안 피해자가 있는 곳에 가해자가 접근하면 곧바로 경찰에 체포된다. 경찰이 가해자를 구속했다가 풀어줄 경우에도 재판 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까이 갈 수 없도록 조건부 석방 조치를 내린다.
이성용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선진국들은 가해자의 인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데이트 폭력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제재규정을 마련하고 있다”며 “한국도 데이트 폭력 예방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환/박상용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