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Insight]  레고그룹 예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 CEO, 단순한 놀이에 도전정신 가미
레고는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장난감’으로 꼽힌다. 지금까지 6000억개가 넘는 블록이 생산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미국 경제지 포천은 농담조로 “적어도 100억개는 소파 쿠션 밑에, 30억개는 진공청소기 안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레고를 만드는 덴마크 레고그룹은 작년 매출로 358억덴마크크로네(약 6조원), 영업이익으로 122억크로네(약 2조원)를 벌었다. 영업이익률은 34.2%로 구글(25.8%)과 페이스북(34.7%)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에 꿀리지 않는다.

하지만 2003년만 해도 얘기가 달랐다. 레고그룹은 그해 역대 최대인 15억크로네(약 2600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파산 위기에 몰렸다. 그랬던 레고를 되살려 놓은 사람이 현재 레고그룹 최고경영자(CEO)인 예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다. 2013년 《레고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라는 책을 펴낸 데이비드 로버트슨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경영대 교수는 “어떤 면에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보다 더 혁신적인 CEO의 본보기”라고 평가했다.

서른여섯 나이에 CEO로 깜짝 발탁

[BIZ Insight]  레고그룹 예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 CEO, 단순한 놀이에 도전정신 가미
1968년 덴마크 동부 해안가의 프레데리시아에서 태어난 크누스토르프는 여느 아이들처럼 어릴 적부터 레고를 갖고 놀았다. 하지만 레고에서 일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덴마크 오르후스대에서 경제학과 동아시아학을 공부한 그는 영국 크랜필드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땄고, 이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오르후스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 들어간 첫 직장은 컨설팅회사 맥킨지의 프랑스 파리 사무소였다.

두 번째 직장이 레고그룹이다. 그는 3년여간의 컨설턴트 경험과 경제학 박사라는 전문성을 높이 평가받아 전략개발실을 책임지는 임원으로 스카우트됐다. 레고를 가지고 놀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어릴적 기분 좋은 기억도 레고로의 이직에 한몫했다.

하지만 레고의 사세는 이미 기운 상태였다. 1990년대 들어 비디오·컴퓨터 게임이 유행하며 아이들은 블록 놀이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레고는 1998년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1999년 전반기에 역대 최대인 1000명의 직원을 해고했지만 이후에도 적자는 줄지 않았다.

2003년 6월 레고그룹의 임원 회의에서 크누스토르프는 작심하고 쓴소리를 뱉어냈다. “매출은 줄어드는데 비용은 급증하고 있다. 내년에는 순손실이 두 배가 된다. 지금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그룹의 토대가 무너질 것이다.” 입사 3년이 채 되지 않은 신참의 발언에 회사 중역들은 아연실색하며 귀를 닫았다. 이들은 경기가 살아나면, 새로운 제품 시리즈가 출시되면 매출도 늘어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CEO였던 창업자의 손자 크옐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은 그를 눈여겨 보고 이듬해 크누스토르프를 새 CEO로 깜짝 발탁했다. 1932년 창업 이래 대대로 크리스티안센 가문이 비상장을 유지하며 경영해왔던 레고그룹으로선 첫 외부인 CEO였다.

핵심인 ‘레고 블록’에 역량 집중

서른여섯의 젊은 CEO가 내놓은 해법은 ‘기본에 충실하자’였다. 크누스토르프는 “CEO가 되고 나서 스스로 던진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였다”며 “다른 회사라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겠지만 레고에선 매우 쉬웠다”고 설명했다. 바로 어린이들이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기구를 만드는 일이다. 레고의 핵심 가치는 ‘잘 놀아요’라는 뜻의 두 덴마크 단어(leg godt)를 합쳐서 만든 사명(lego)에도 드러나 있다.

상상력에 도전을 입히다

그는 우선 테마파크인 레고랜드의 지분 70%를 사모펀드 운용사인 블랙록에 팔았다. 컴퓨터 게임 부서도 없앴다. 놀이공원과 게임은 많은 투자 비용에도 수익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고는 블록 장난감으로 떴지만 당시 회사 안에서 블록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신 레고라는 브랜드를 이용해 액션 피규어나 비디오 게임, 액세서리사업 같은 분야로 확장하려고만 했다. 1988년 ‘상호결속 블록’에 대한 특허가 만료되면서 오히려 블록 장난감으론 레고보다 캐나다의 메가블록스, 폴란드의 코비에스에이, 중국의 옥스퍼드브릭스의 인기가 높았다.

크누스토르프 CEO는 레고가 가장 잘하는 일인 ‘레고 블록’에 다시 힘을 집중시켰다. 5세 이하 유아용 블록인 ‘듀플로’ 시리즈를 강화했고, 레고 매출의 20%를 차지하는 성인들을 위한 시리즈도 내놨다. 스타워즈나 해리포터 시리즈는 효자 상품이었지만 상당한 금액을 브랜드 수수료로 내야 했다. 이 때문에 크누스토르프 CEO는 일본의 닌자를 차용한 ‘닌자고’, 여자 어린이를 위한 레고인 ‘프렌즈’ 등 자체 개발 시리즈를 적극 내놓았다. 비용 절감을 위해 블록 부품도 과감히 줄였다. 크고 작은 1만4200여개의 블록을 하나하나 검토해 중복되거나 불필요한 블록은 생산을 중단했다.

네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고객 조사에도 만전을 기했다. 그는 ‘레고 앤트로스’라고 이름 붙인 조사팀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시카고, 독일 뮌헨과 함부르크 등의 가정에 보냈다. 몇 달에 걸쳐 부모와 면담하고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아이들의 세계를 연구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아이들은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것에 도전해 기술을 습득하고 이것을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도 놀이를 한다는 것이었다.

레고는 조사 결과를 제품 개발에 반영하는 한편 ‘레고 클럽하우스’를 운영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조립하기 쉬운 레고 상자부터 난이도가 높은 상자까지 도전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더 나이가 많은 형·누나들이 어려운 블록을 조립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고, 또 도전의식을 갖게 된다.

한동안 수평선을 유지하던 레고의 매출 그래프는 2007년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그렸다. 2007~2015년 레고의 매출은 4배 이상, 영업이익은 8배 이상 늘었다. CEO 취임 후 실시한 인원 감축으로 2007년 4330명까지 줄었던 임직원 수는 작년 1만3974명으로 증가했다.

크누스토르프 CEO의 성과 덕분에 앞으로 레고그룹의 CEO 자리는 계속 외부인이 맡게 될 전망이다. 가업을 승계하게 된 창업주의 4대손 토마스 키르크 크리스티안센 부회장은 지난달 27일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스티안센 가문은 앞으로도 CEO를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