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500유로 지폐
유로화 최고액권 500유로(약 70만원)의 별명은 ‘빈 라덴’이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만 본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유럽인의 60%가 만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여행 중 500유로짜리를 건넸다가는 별종 취급받기 일쑤다. 환전을 거부하는 나라도 있다. 2002년 화려하게 등장할 때와는 대조적이다.

고액 지폐는 거래 수단보다는 가치 저장 성격이 강하다. 시중에 유통되는 것보다 금고로 들어가는 게 더 많다. 경제 규모가 클수록 고액권 비중이 높다. 통화 확대 시 고액권이 많을수록 화폐 유통 속도가 느려져 물가 부담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이런 통화정책적 편익 때문에 중앙은행들이 선호한다.

유럽중앙은행(ECB)이 500유로 발권을 2018년부터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탈세, 마약 거래, 테러 자금 등 불법 사용 폐해가 크다는 것이다. 범죄를 막기 위한 고액권 폐지를 수사기관이 아니라 금융당국이 하는 이유는 뭘까.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마피아 본고장인 이탈리아의 중앙은행장 출신이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지구촌의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ECB가 침체된 유럽 경제를 살리려고 마이너스 금리까지 도입했는데도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다. 소비자로선 은행에 보관료까지 내고 돈을 맡기느니 고액권으로 바꿔 집에 쌓아 두는 게 유리하다. 정책효과를 반감시키는 이런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ECB는 500유로 지폐를 서둘러 없애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액 지폐를 많이 쓰는 독일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고액권을 폐지해도 범죄는 줄지 않고 현금 유통량만 감소해 불편이 커질 것이라는 얘기다. 오스트리아도 반대하고 나섰다. 스위스 중앙은행 역시 세계 최고액권인 1000프랑(약 130만원) 폐지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국에서도 5만원권이 지하경제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많았다. 2009년 나온 5만원권의 환수율이 2010년 41.4%에서 2014년 25.8%로 낮아졌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2015년엔 40.1%로 높아졌으니, 이것도 어느 한 면만 볼 일은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는지 모른다. 세계적인 저성장과 저금리, 양적 완화, 마이너스 금리가 얽힌 데다 정보통신기술(ICT) 혁명, 인구 구조, 생활패턴 변화까지 설키면서 과거의 통화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졌다. ‘아날로그 화폐’와 ‘디지털 경제’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파열음이라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