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꿈꾼 운동권' 우상호, '화통한 팔씨름왕' 정진석, '정치 8단'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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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원내사령탑 오른 '3인 3색' 인물 탐구
강경 86그룹과 '결' 다른 우상호
오월 문학상·윤동주 문학상 받아
계파정치와 거리두고 독자행보…'실력없는 진보' 꼬리표 뗄지 관심
'소통 정치' 주목받는 정진석
태권도 유단자로 성격 시원시원
'세종시 갈등' 때 조정자 역할…당청관계·계파이해 조율이 과제
74세에도 '왕성한 현역' 박지원
젊은세대 뺨치는 촌철살인 명수
8명 탈락시킨 '청문회 낙마 8관왕'…생산적 국회 만들지 모두가 주목
강경 86그룹과 '결' 다른 우상호
오월 문학상·윤동주 문학상 받아
계파정치와 거리두고 독자행보…'실력없는 진보' 꼬리표 뗄지 관심
'소통 정치' 주목받는 정진석
태권도 유단자로 성격 시원시원
'세종시 갈등' 때 조정자 역할…당청관계·계파이해 조율이 과제
74세에도 '왕성한 현역' 박지원
젊은세대 뺨치는 촌철살인 명수
8명 탈락시킨 '청문회 낙마 8관왕'…생산적 국회 만들지 모두가 주목
“DJP(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문하생들끼리 협치를 잘 해봤으면 좋겠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56)가 5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실로 우상호 원내대표(54)를 찾아 던진 일성이다. 두 사람은 DJP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생산적인 국회를 만들자”고 입을 모았다. 두 당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온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이날 “당분간 상황을 관망하겠다”며 ‘속도조절’에 들어갔다. 20대 국회는 정 원내대표의 타협론과 소통론, 우 원내대표의 패기론, 박 원내대표의 노련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에 달려있다는 분석이다. 정치입문 동기 등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지만 세 사람 모두 DJP로부터 정치를 배웠다는 점과 협상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최적의 조합이란 긍정적 평가가 나온다.
○‘여소야대’ 주목받는 ‘정진석표’ 소통
184㎝ 키에 90㎏이 넘는 거구의 정 원내대표는 태권도 유도 등 무술 유단자로 알려졌다. 지금껏 팔씨름을 해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한다. 체격에 걸맞게 성격도 화통하다. 성동고 재학 시절 학생회장으로 반미 시위를 주도하긴 했지만 자신의 이념 성향에 대해선 ‘보수’라고 강조한다. 다만 “꼴보수는 아닌 합리적 보수”라고 한다. 야당 원내대표들이 “역대 여당 원내대표 중 협상 파트너로 최고”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정 원내대표는 1999년 김종필 당시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 특보로 정치에 입문했다. 16, 17대 충남 공주·연기에서 당선한 뒤 18대엔 비례대표로 3선에 성공했지만 19대에서 낙선했다. 이번에 4선 고지에 올랐다. 6선 의원을 지낸 고(故) 정석모 전 내무부 장관의 아들로 부자(父子)가 합치면 10선이다. 그는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국민중심당을 탈당, 이듬해 1월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10년엔 이명박 대통령 정무수석으로 발탁됐다. 2014년 지방선거에선 친박(박근혜)계의 지원을 받아 충남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정무수석으로 발탁될 때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던 박근혜 대통령의 내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범친박(친박근혜)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그는 2014년 출간한 저서 사다리정치에서 “단절된 곳을 잇고 위아래를 연결하는 사다리 같은 역할이 정진석표 정치”라고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설명했다. 화합하되 원칙을 잃지는 않는다는 의미의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전체를 아우른다는 의미의 ‘통섭’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정무수석 시절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갈등을 빚었던 이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의 만남을 성사시켜 정권 재창출의 디딤돌을 놓았다는 평가다. 취임 후 ‘청와대와의 쌍방향 소통’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자신을 민 친박계와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가져갈지와 수평적 당청 관계를 어떻게 복원할지가 첫 시험대다.
○‘운동권 꼬리표’ 우상호의 카드는?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86(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은 우 원내대표를 언급할 때 따라붙는 키워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경선 후 인사말에서 “나의 당선은 새로운 정치세대의 전면적 등장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실력 없는 진보’란 지긋지긋한 운동권 ‘꼬리표’를 떼고 정치 세대교체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는 당내 강성파로 분류되는 86그룹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특정계파에 거리를 두면서 강성 이미지보다 합리적 중도파로서 두루 교분을 넓히면서 독자 행보를 걸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내대표 경쟁자인 우원식 의원과 486그룹, 민평련(민주평화국민연대), 당내 혁신모임 ‘더좋은 미래’ 등 지지기반이 겹쳤던 그가 결선에서 7표 차이로 역전승을 거둔 배경이다.
그는 학창시절 시인을 꿈꿨다. 대학에서도 국문학 전공에 문학동아리 활동을 했다. 6월항쟁 1년 전인 1986년에는 오월 문학상 시 부문 당선, 윤동주 문학상을 받으며 예비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전에세이 촌놈에서도 목차별로 맨 앞에 자작시를 넣었다. 독재정권이 없었다면 시인이 됐을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당 대변인만 여덟 번을 맡은 것도 문학적 소양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초선이 대거 입성한 개원국회가 아니었다면 계파가 없는 우상호는 죽었다 깨어나도 원내대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취임 일성도 “아무리 좋은 가치와 정책도 내부 싸움과 분열에 갇히면 빛을 발할 수 없다”며 “20대 국회에 당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 목표인 ‘정권교체’를 위해선 최우선 과제가 계파 청산이란 의미다.
박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우 원내대표가 최상의 협상파트너지만 전대협 꼬리표를 완전히 떼지 못한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국회 최대 변수된 ‘박지원의 정치력’
1942년생인 박 원내대표는 올해 74세다. 하지만 그에게 ‘원로’란 수식어는 따라붙지 않는다. 젊은 세대 뺨치는 촌철살인의 ‘말발’과 트레이드마크가 된 ‘금귀월래(金歸月來·매주 금요일에 지역구인 목포에 내려갔다가 월요일 서울로 올라온다는 뜻)’의 왕성한 활동으로 ‘올드’란 이미지를 벗겨낸 덕분이다.
4선 의원에 세 번의 원내대표, 청와대와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김대중 정권의 최대 실세였던 그의 정치력과 전투력은 현역 정치인 중 맞수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2014년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와 당권을 다퉜을 때 예상과 달리 둘의 득표율 차이는 불과 3.4%였다. 당내 주류인 친노(친노무현)세력을 등에 업은 문 전 대표와의 싸움을 박빙승부로 끌고 간 것은 ‘박지원 개인기’를 빼곤 설명이 안 된다. 2013년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주도한 ‘새정치 바람’을 조기 진압한 것도 그였다. 당시 신당 참여를 저울질하던 통합민주당 인사들을 향해 ‘기웃세력’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신당 바람은 잦아들었고 이듬해 새정치민주연합으로 합당됐다.
정·재계를 망라한 마당발 인맥을 바탕으로 한 거미줄 같이 촘촘한 정보망은 그의 자산이다. 율사 출신이 아니면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맹활약했던 이유다. 그는 스스로를 ‘청문회 낙마 8관왕’이라고 부른다. 야당 측 청문위원장을 맡아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까지 감사원장, 헌법재판관, 국무총리 후보 등 8명의 후보들을 줄줄이 사퇴시기는 데 큰 역할을 해서다.
박 원내대표는 ‘정치8.5단’이란 평가를 받는다. 새누리당과 더민주 원내대표 경선의 변수가 됐을 정도다. 정치적 스승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스스로 호남 지역감정이 문제라고 하지만, 지역감정을 가장 잘 이용하는 정치인 소리도 듣고 있다. 그의 조정 역할에 20대 국회 성패가 달렸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온다.
손성태/유승호 기자 mrhand@hankyung.com
사진=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56)가 5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실로 우상호 원내대표(54)를 찾아 던진 일성이다. 두 사람은 DJP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생산적인 국회를 만들자”고 입을 모았다. 두 당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온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이날 “당분간 상황을 관망하겠다”며 ‘속도조절’에 들어갔다. 20대 국회는 정 원내대표의 타협론과 소통론, 우 원내대표의 패기론, 박 원내대표의 노련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에 달려있다는 분석이다. 정치입문 동기 등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지만 세 사람 모두 DJP로부터 정치를 배웠다는 점과 협상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최적의 조합이란 긍정적 평가가 나온다.
○‘여소야대’ 주목받는 ‘정진석표’ 소통
184㎝ 키에 90㎏이 넘는 거구의 정 원내대표는 태권도 유도 등 무술 유단자로 알려졌다. 지금껏 팔씨름을 해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한다. 체격에 걸맞게 성격도 화통하다. 성동고 재학 시절 학생회장으로 반미 시위를 주도하긴 했지만 자신의 이념 성향에 대해선 ‘보수’라고 강조한다. 다만 “꼴보수는 아닌 합리적 보수”라고 한다. 야당 원내대표들이 “역대 여당 원내대표 중 협상 파트너로 최고”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정 원내대표는 1999년 김종필 당시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 특보로 정치에 입문했다. 16, 17대 충남 공주·연기에서 당선한 뒤 18대엔 비례대표로 3선에 성공했지만 19대에서 낙선했다. 이번에 4선 고지에 올랐다. 6선 의원을 지낸 고(故) 정석모 전 내무부 장관의 아들로 부자(父子)가 합치면 10선이다. 그는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국민중심당을 탈당, 이듬해 1월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10년엔 이명박 대통령 정무수석으로 발탁됐다. 2014년 지방선거에선 친박(박근혜)계의 지원을 받아 충남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정무수석으로 발탁될 때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던 박근혜 대통령의 내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범친박(친박근혜)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그는 2014년 출간한 저서 사다리정치에서 “단절된 곳을 잇고 위아래를 연결하는 사다리 같은 역할이 정진석표 정치”라고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설명했다. 화합하되 원칙을 잃지는 않는다는 의미의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전체를 아우른다는 의미의 ‘통섭’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정무수석 시절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갈등을 빚었던 이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의 만남을 성사시켜 정권 재창출의 디딤돌을 놓았다는 평가다. 취임 후 ‘청와대와의 쌍방향 소통’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자신을 민 친박계와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가져갈지와 수평적 당청 관계를 어떻게 복원할지가 첫 시험대다.
○‘운동권 꼬리표’ 우상호의 카드는?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86(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은 우 원내대표를 언급할 때 따라붙는 키워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경선 후 인사말에서 “나의 당선은 새로운 정치세대의 전면적 등장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실력 없는 진보’란 지긋지긋한 운동권 ‘꼬리표’를 떼고 정치 세대교체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는 당내 강성파로 분류되는 86그룹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특정계파에 거리를 두면서 강성 이미지보다 합리적 중도파로서 두루 교분을 넓히면서 독자 행보를 걸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내대표 경쟁자인 우원식 의원과 486그룹, 민평련(민주평화국민연대), 당내 혁신모임 ‘더좋은 미래’ 등 지지기반이 겹쳤던 그가 결선에서 7표 차이로 역전승을 거둔 배경이다.
그는 학창시절 시인을 꿈꿨다. 대학에서도 국문학 전공에 문학동아리 활동을 했다. 6월항쟁 1년 전인 1986년에는 오월 문학상 시 부문 당선, 윤동주 문학상을 받으며 예비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전에세이 촌놈에서도 목차별로 맨 앞에 자작시를 넣었다. 독재정권이 없었다면 시인이 됐을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당 대변인만 여덟 번을 맡은 것도 문학적 소양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초선이 대거 입성한 개원국회가 아니었다면 계파가 없는 우상호는 죽었다 깨어나도 원내대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취임 일성도 “아무리 좋은 가치와 정책도 내부 싸움과 분열에 갇히면 빛을 발할 수 없다”며 “20대 국회에 당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 목표인 ‘정권교체’를 위해선 최우선 과제가 계파 청산이란 의미다.
박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우 원내대표가 최상의 협상파트너지만 전대협 꼬리표를 완전히 떼지 못한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국회 최대 변수된 ‘박지원의 정치력’
1942년생인 박 원내대표는 올해 74세다. 하지만 그에게 ‘원로’란 수식어는 따라붙지 않는다. 젊은 세대 뺨치는 촌철살인의 ‘말발’과 트레이드마크가 된 ‘금귀월래(金歸月來·매주 금요일에 지역구인 목포에 내려갔다가 월요일 서울로 올라온다는 뜻)’의 왕성한 활동으로 ‘올드’란 이미지를 벗겨낸 덕분이다.
4선 의원에 세 번의 원내대표, 청와대와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김대중 정권의 최대 실세였던 그의 정치력과 전투력은 현역 정치인 중 맞수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2014년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와 당권을 다퉜을 때 예상과 달리 둘의 득표율 차이는 불과 3.4%였다. 당내 주류인 친노(친노무현)세력을 등에 업은 문 전 대표와의 싸움을 박빙승부로 끌고 간 것은 ‘박지원 개인기’를 빼곤 설명이 안 된다. 2013년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주도한 ‘새정치 바람’을 조기 진압한 것도 그였다. 당시 신당 참여를 저울질하던 통합민주당 인사들을 향해 ‘기웃세력’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신당 바람은 잦아들었고 이듬해 새정치민주연합으로 합당됐다.
정·재계를 망라한 마당발 인맥을 바탕으로 한 거미줄 같이 촘촘한 정보망은 그의 자산이다. 율사 출신이 아니면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맹활약했던 이유다. 그는 스스로를 ‘청문회 낙마 8관왕’이라고 부른다. 야당 측 청문위원장을 맡아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까지 감사원장, 헌법재판관, 국무총리 후보 등 8명의 후보들을 줄줄이 사퇴시기는 데 큰 역할을 해서다.
박 원내대표는 ‘정치8.5단’이란 평가를 받는다. 새누리당과 더민주 원내대표 경선의 변수가 됐을 정도다. 정치적 스승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스스로 호남 지역감정이 문제라고 하지만, 지역감정을 가장 잘 이용하는 정치인 소리도 듣고 있다. 그의 조정 역할에 20대 국회 성패가 달렸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온다.
손성태/유승호 기자 mrhand@hankyung.com
사진=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