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권력 동원해 부실기업 살리는데 무슨 기업가 정신이 싹트겠나"
“대기업 취업에 목매는 청년실업자가 수십만 명인데 중앙은행의 발권력까지 동원해서 부실 대기업을 살리겠다고 합니다. 혹여 기업가 정신과 도전 정신을 위축시키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박희재 산업통상자원부 연구개발(R&D)전략기획단장(55·사진)은 6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선·해운 등 부실기업 구조조정 논의에 대해 작심한 듯 이같이 격정을 토로했다. 그는 2013년부터 ‘국가최고기술책임자(CTO)’로 불리는 산업부 R&D전략기획단장(차관급 비상근직)을 맡아 3년간 무보수로 일했다.

산업부는 지난달 임기가 만료된 박 단장 후임을 상근직으로 뽑기로 방침을 정하고 공모 절차를 밟고 있다.

▶본지 5월6일자 A10면 참조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인 박 단장은 1998년 서울대 실험실 벤처1호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업체 에스엔유(SNU)프리시젼을 창업한 대표적 교수 사업가다. 외환위기 당시 “의병을 일으키는 마음으로 단 1달러라도 벌기 위해 창업에 나섰다”고 한 그의 말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2005년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에스엔유프리시젼의 매출은 2013년 1000억원을 넘어섰다. 이 회사의 수출액 비중은 80%에 달한다.

박 단장은 “시장 논리로 움직이는 기업가들에게 ‘공짜점심’은 없다”며 “중소기업에서는 부채비율이 80~90%만 넘어가도 은행 대출 회수 얘기가 나오는데 부채비율이 7000%가 넘는 대기업에 나랏돈을 쏟아붓겠다고 하니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2013년 에스엔유프리시젼이 중국 디스플레이업체인 BOE에서 600억원어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장비를 처음 수주했지만 국내 금융권에서 계약이행보증을 서주지 않아 한동안 고생했던 일도 털어놨다. “청년실업, 규제완화, 금융개혁 등 손댈 게 한둘이 아닌데 온 나라가 대기업 하나 살리는 일에 몰두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차라리 그 돈을 신산업 육성과 청년실업 해결에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외부 전문가로 정부에서 3년간 일한 박 단장은 공직사회 특유의 ‘칸막이 행정’을 국가 R&D 혁신의 가장 큰 걸림돌로 봤다. 그는 “처음 산업부에 와서 보니 국·과별로 R&D 예산이 촘촘히 짜여 있어 손댈 곳이 마땅치 않았다”며 “혹시라도 다른 과로 예산을 넘기면 과장이 무능한 걸로 보일까 두려워 다들 예산을 움켜쥐고 있어 당황스러웠다”고 설명했다.

박 단장은 대기업 위주로 정책을 입안하는 공무원들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대기업은 신산업에 뛰어들겠다는 도전 정신을 잃어버린 지 오래”라며 “대기업이 신산업에 나설 때까지 기다렸다 지원하면 된다는 (공무원들의) 막연한 생각은 큰 착각”이라고 지적했다.

2013년 단장 취임 직후부터 공과대학 혁신을 끊임없이 강조해 온 박 단장은 “나도 교수 출신이지만 연구실에 틀어박혀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논문에만 집착하는 연구 관행은 문제가 많다”며 “중소기업 R&D 혁신에 쓰일 돈이 다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로 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십만 청년이 취업을 못해 거리를 헤매는데 서울대가 세계 대학 평가에서 10위 안에 든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박 단장은 재임 중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대형 R&D 사업인 ‘13대 산업엔진 프로젝트’를 입안한 것을 가장 보람된 일로 꼽았다.

그는 “기술을 둘러싼 시장·금융·규제개혁 등 생태계 전반에 초점을 맞추고 글로벌 강소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해 의미 있었다”고 했다.

아쉬운 점으로는 이 같은 신산업 투자가 절차상 문제로 지연된 것을 들었다. 박 단장은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에만 2년 정도 걸리다 보니 예산 반영 등을 거치면 입안한 지 4년 만에 실제 투자가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며 “신산업 투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최대주주이자 대표, 서울대 교수, 차관급 공무원이라는 세 개 직책을 지난 3년간 동시에 수행한 박 단장은 “교수로서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는 한편 기업에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내는 ‘창직(創職)’에 매진할 예정”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