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무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책읽기가 내 상상력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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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본고장 브로드웨이도 인정한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씨
내년 데뷔 30년…큰 그림 그리는 게 매력
고 최인호가 우상이던 소설가 지망생
대기업 관두고 '무대 디자이너'로 전업
연극 연출가 임영웅을 만나다
연극 '숲속의 방'으로 무대 디자인 데뷔
브로드웨이 간 '명성황후' 무대로 명성
무대 디자이너는 시인·화가·건축가
극의 긴장감 살리는 아름다운 '미장센'
미술서적부터 역사서까지 독서의 결실
내년 데뷔 30년…큰 그림 그리는 게 매력
고 최인호가 우상이던 소설가 지망생
대기업 관두고 '무대 디자이너'로 전업
연극 연출가 임영웅을 만나다
연극 '숲속의 방'으로 무대 디자인 데뷔
브로드웨이 간 '명성황후' 무대로 명성
무대 디자이너는 시인·화가·건축가
극의 긴장감 살리는 아름다운 '미장센'
미술서적부터 역사서까지 독서의 결실
2011년 8월23일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링컨센터. 안중근 의사의 삶을 다룬 뮤지컬 ‘영웅(Hero)’의 첫 브로드웨이 공연이 막을 올렸다.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 영상이 등장하더니 어느새 실물 크기의 거대한 열차로 바뀌는 마법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관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차 외벽에는 흩날리는 눈폭풍이 투사됐다가 화려한 객차 실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으로 변했다. 극 중 설희가 눈보라 속으로 꽃잎처럼 뛰어내리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객석에선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뉴욕타임스는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2막에 등장하는 실물 크기의 기차”라고 극찬했다.
이 장면은 무대 디자인을 맡은 박동우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54)의 아이디어였다. 하얼빈역에서의 거사 장면이 아무런 예고 없이 등장하면 극의 긴장감이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장센’이 그렇게 탄생했다. 미국 공연예술 전문매체 스테이지앤드시네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영상 기차가 실물 기차로 바뀌는 장면에 대해 “무대 위의 렘브란트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이 극예술의 장엄함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극찬했다. ‘빛의 화가’라고 불린 렘브란트처럼 무대 위에서 빛을 절묘하게 사용했다는 찬사였다.
무대 위의 ‘미다스의 손’이라고 불리는 박 교수를 만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사무실을 찾았다. 미학적이고 상징적인 무대로 정평이 난 그는 한국에서 가장 바쁜 무대 디자이너로 꼽힌다. 그의 사무실은 디자이너보다 학자의 연구실에 가까웠다. 양쪽 벽을 가득 메운 서가는 무대 미술과 관련된 책부터 역사서까지 다양한 서적으로 빼곡했다.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가자 그의 손을 거쳐 간 무대 세트들이 보물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최근에는 오페라 ‘루살카’ 무대를 설치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며 “내년이 데뷔 30주년이라 지난 작품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찾아오는 연출가들을 외면할 수가 없어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웃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시골 청년
어린 시절 박 교수의 꿈은 소설가였다. 경북 청송에서 태어난 그는 “공연이란 게 세상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외딴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소년의 우상은 고(故) 최인호 선생이었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키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서울에서 재수 생활을 하면서 그의 꿈은 달라졌다. 매일 아침 서울역 대우빌딩 앞에서 버스를 타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처럼 되겠다고 생각했다. 영문학과 대신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유다.
연세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가면서 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친구를 따라 우연히 연극반 신입생 환영회에 갔는데, 사람들이 재미있고 좋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존경하던 최인호 선배가 계신 곳이기도 했고요. 사투리 때문에 배우는 못 하고, 미술을 좋아하니 무대미술과 장치를 꾸미는 쪽을 맡았습니다. 내가 직접 ‘큰 그림’을 그린다는 매력에 푹 빠졌죠.”
◆대기업 그만두고 무대 디자이너로
그렇게 열정적인 대학시절을 보낸 뒤 대우전자 컴퓨터 사업부에 입사했다. 회사 생활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1년 반쯤 다니다가 ‘안 되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자’며 무작정 뛰쳐나왔죠. ‘무대 디자이너’라는 이름도 낯선 시대였지만 충분히 잘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 길로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 진학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회사 로고 제작부터 인테리어, 광고, 인쇄물, 심지어 놀이공원 퍼레이드 세트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1986년 산울림 소극장에서 하는 공연 포스터 디자인을 맡으며 임영웅 연출을 만난 것. “선생님, 저는 포스터보다 무대 디자인을 더 잘하는 사람입니다.” 임 연출은 당돌한 청년의 패기를 믿고 무대를 맡겼다. 1987년 공연한 임 연출의 연극 ‘숲 속의 방’은 박 교수의 데뷔작이 됐다.
그에게 임 연출은 연극의 진수를 알려준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임 연출 역시 그의 무대 철학을 존중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창원 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창원에 내려간 선생님에게서 급하게 연락이 왔어요. 잠깐 와 줬으면 좋겠다고요. 큰 문제가 생겼나 싶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죠. 객석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이러셨어요. ‘저 나무를 30㎝만 오른쪽으로 옮기면 어떨까?’ 제가 그린 도면을 존중한 거였어요. 위치 하나도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죠.”
◆‘브로드웨이 콤플렉스’ 날려버린 ‘명성황후’
1990년 방문한 브로드웨이는 ‘국내파’였던 그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기가 아니어서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어요.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보러 갔는데, 자베르 경감이 다리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다리가 올라가면서 회전무대가 돌고, 센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주죠. ‘캣츠’ ‘미스 사이공’ 무대를 만든 존 내피어의 작품이었는데, ‘극장성’을 극대화한 무대였어요.”
당시 공연계에는 ‘브로드웨이 콤플렉스’라는 게 있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공연을 만들어도 브로드웨이 무대는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부지런히 내공을 쌓았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1995년 초연한 뮤지컬 ‘명성황후’다. 1997년엔 한국 창작뮤지컬 최초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명성황후 공연은 ‘브로드웨이 콤플렉스’를 한 방에 날려버린 기회였어요. 이중 회전무대 도면을 받아들고 ‘저게 되겠느냐’고 의심하던 현지 관계자들도 공연을 보고 깜짝 놀랐죠. 저에게도 한국 공연사에도 참 중요한 작품입니다.”
◆AI 시대 먹고살 길은 ‘상상력 산업’
이후 그는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무대를 주로 선보였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는 주인공의 불안함이 더해질수록 아파트를 상징하는 8m 높이의 벽 9개가 무대 안쪽으로 밀려온다. 연극 ‘사회의 기둥들’에서는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해 극이 진행될수록 무대가 서서히 기울어지도록 했다.
이런 상상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는 “어린 시절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은 덕분”이라고 했다. 소설을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던 습관이 도움이 됐다. 뮤지컬 ‘영웅’에서 설희가 눈꽃 흩날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그가 어린 시절 꾼 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디자인을 구체화하기 위해 일본에서 열차와 관련된 서적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그는 자신의 책장 한쪽을 가리키며 “뮤지컬 ‘영웅’의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읽은 책만 50권이 넘는다”고 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우리가 앞으로 먹고살 수 있는 건 ‘상상력 산업’이에요. 노동력만으로는 중국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애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기술이 아니라 디자인과 상상력이거든요.”
자신의 삶의 여정을 풀어놓던 그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무대가 있었다”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 소설가를 꿈꿨고, 건축과에 진학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어요. 지금도 심심할 땐 그림을 그려요. 어떻게 보면 무대 디자이너가 된 것은 제게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무대 디자이너는 종합 예술을 한다고 해서 ‘시인이자 화가이자 건축가’라고 표현하거든요. 지금 어디에 있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세요.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저처럼 길이 보일 겁니다.”
무대 디자이너의 세계
작품해석 토대로 무대 디자인 풍부한 인문학적 상상력 필수
“여자가 하기에는 힘들지 않아? 망치 들고 다니면서 직접 조립하고, 무거운 거 나르고 하는 일 아니야?” ‘무대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이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박동우 교수는 “건축가가 직접 시멘트 포대를 나르고 공사를 하지 않듯, 무대 디자이너도 직접 공사하지는 않는다”며 “재능만 있다면 힘들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무대 디자이너는 작품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토대로 무대를 디자인한다. 무대 장치를 제작하는 전문회사는 따로 있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디자인이 의도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박 교수는 무대 디자이너의 기본적인 자질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꼽았다.
“많이 읽고 많이 경험해야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무대를 단순히 장소의 재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는 절대 좋은 무대를 설치할 수 없습니다. 작품을 읽고 해석하고, 거기서 어떤 개념을 도출하는 작업을 거쳐야 상징적인 무대를 꾸밀 수 있습니다.”
박 교수가 최근 작업한 오페라 ‘루살카’는 체코판 인어공주 이야기다. 그는 잔잔한 호수 위로 콘크리트 감옥 같은 사각 무대가 밀고 들어오게 했다. 문명이 자연을 침범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마지막에 무대에 내린 비는 문명과 자연의 화해를 상징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 이 공연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고민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학부에서 전공하지 못했다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홍익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용인대 등에서 무대 디자인 대학원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이 장면은 무대 디자인을 맡은 박동우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54)의 아이디어였다. 하얼빈역에서의 거사 장면이 아무런 예고 없이 등장하면 극의 긴장감이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장센’이 그렇게 탄생했다. 미국 공연예술 전문매체 스테이지앤드시네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영상 기차가 실물 기차로 바뀌는 장면에 대해 “무대 위의 렘브란트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이 극예술의 장엄함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극찬했다. ‘빛의 화가’라고 불린 렘브란트처럼 무대 위에서 빛을 절묘하게 사용했다는 찬사였다.
무대 위의 ‘미다스의 손’이라고 불리는 박 교수를 만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사무실을 찾았다. 미학적이고 상징적인 무대로 정평이 난 그는 한국에서 가장 바쁜 무대 디자이너로 꼽힌다. 그의 사무실은 디자이너보다 학자의 연구실에 가까웠다. 양쪽 벽을 가득 메운 서가는 무대 미술과 관련된 책부터 역사서까지 다양한 서적으로 빼곡했다.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가자 그의 손을 거쳐 간 무대 세트들이 보물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최근에는 오페라 ‘루살카’ 무대를 설치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며 “내년이 데뷔 30주년이라 지난 작품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찾아오는 연출가들을 외면할 수가 없어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웃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시골 청년
어린 시절 박 교수의 꿈은 소설가였다. 경북 청송에서 태어난 그는 “공연이란 게 세상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외딴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소년의 우상은 고(故) 최인호 선생이었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키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서울에서 재수 생활을 하면서 그의 꿈은 달라졌다. 매일 아침 서울역 대우빌딩 앞에서 버스를 타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처럼 되겠다고 생각했다. 영문학과 대신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유다.
연세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가면서 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친구를 따라 우연히 연극반 신입생 환영회에 갔는데, 사람들이 재미있고 좋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존경하던 최인호 선배가 계신 곳이기도 했고요. 사투리 때문에 배우는 못 하고, 미술을 좋아하니 무대미술과 장치를 꾸미는 쪽을 맡았습니다. 내가 직접 ‘큰 그림’을 그린다는 매력에 푹 빠졌죠.”
◆대기업 그만두고 무대 디자이너로
그렇게 열정적인 대학시절을 보낸 뒤 대우전자 컴퓨터 사업부에 입사했다. 회사 생활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1년 반쯤 다니다가 ‘안 되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자’며 무작정 뛰쳐나왔죠. ‘무대 디자이너’라는 이름도 낯선 시대였지만 충분히 잘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 길로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 진학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회사 로고 제작부터 인테리어, 광고, 인쇄물, 심지어 놀이공원 퍼레이드 세트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1986년 산울림 소극장에서 하는 공연 포스터 디자인을 맡으며 임영웅 연출을 만난 것. “선생님, 저는 포스터보다 무대 디자인을 더 잘하는 사람입니다.” 임 연출은 당돌한 청년의 패기를 믿고 무대를 맡겼다. 1987년 공연한 임 연출의 연극 ‘숲 속의 방’은 박 교수의 데뷔작이 됐다.
그에게 임 연출은 연극의 진수를 알려준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임 연출 역시 그의 무대 철학을 존중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창원 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창원에 내려간 선생님에게서 급하게 연락이 왔어요. 잠깐 와 줬으면 좋겠다고요. 큰 문제가 생겼나 싶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죠. 객석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이러셨어요. ‘저 나무를 30㎝만 오른쪽으로 옮기면 어떨까?’ 제가 그린 도면을 존중한 거였어요. 위치 하나도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죠.”
◆‘브로드웨이 콤플렉스’ 날려버린 ‘명성황후’
1990년 방문한 브로드웨이는 ‘국내파’였던 그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기가 아니어서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어요.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보러 갔는데, 자베르 경감이 다리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다리가 올라가면서 회전무대가 돌고, 센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주죠. ‘캣츠’ ‘미스 사이공’ 무대를 만든 존 내피어의 작품이었는데, ‘극장성’을 극대화한 무대였어요.”
당시 공연계에는 ‘브로드웨이 콤플렉스’라는 게 있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공연을 만들어도 브로드웨이 무대는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부지런히 내공을 쌓았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1995년 초연한 뮤지컬 ‘명성황후’다. 1997년엔 한국 창작뮤지컬 최초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명성황후 공연은 ‘브로드웨이 콤플렉스’를 한 방에 날려버린 기회였어요. 이중 회전무대 도면을 받아들고 ‘저게 되겠느냐’고 의심하던 현지 관계자들도 공연을 보고 깜짝 놀랐죠. 저에게도 한국 공연사에도 참 중요한 작품입니다.”
◆AI 시대 먹고살 길은 ‘상상력 산업’
이후 그는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무대를 주로 선보였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는 주인공의 불안함이 더해질수록 아파트를 상징하는 8m 높이의 벽 9개가 무대 안쪽으로 밀려온다. 연극 ‘사회의 기둥들’에서는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해 극이 진행될수록 무대가 서서히 기울어지도록 했다.
이런 상상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는 “어린 시절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은 덕분”이라고 했다. 소설을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던 습관이 도움이 됐다. 뮤지컬 ‘영웅’에서 설희가 눈꽃 흩날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그가 어린 시절 꾼 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디자인을 구체화하기 위해 일본에서 열차와 관련된 서적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그는 자신의 책장 한쪽을 가리키며 “뮤지컬 ‘영웅’의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읽은 책만 50권이 넘는다”고 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우리가 앞으로 먹고살 수 있는 건 ‘상상력 산업’이에요. 노동력만으로는 중국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애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기술이 아니라 디자인과 상상력이거든요.”
자신의 삶의 여정을 풀어놓던 그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무대가 있었다”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 소설가를 꿈꿨고, 건축과에 진학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어요. 지금도 심심할 땐 그림을 그려요. 어떻게 보면 무대 디자이너가 된 것은 제게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무대 디자이너는 종합 예술을 한다고 해서 ‘시인이자 화가이자 건축가’라고 표현하거든요. 지금 어디에 있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세요.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저처럼 길이 보일 겁니다.”
무대 디자이너의 세계
작품해석 토대로 무대 디자인 풍부한 인문학적 상상력 필수
“여자가 하기에는 힘들지 않아? 망치 들고 다니면서 직접 조립하고, 무거운 거 나르고 하는 일 아니야?” ‘무대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이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박동우 교수는 “건축가가 직접 시멘트 포대를 나르고 공사를 하지 않듯, 무대 디자이너도 직접 공사하지는 않는다”며 “재능만 있다면 힘들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무대 디자이너는 작품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토대로 무대를 디자인한다. 무대 장치를 제작하는 전문회사는 따로 있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디자인이 의도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박 교수는 무대 디자이너의 기본적인 자질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꼽았다.
“많이 읽고 많이 경험해야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무대를 단순히 장소의 재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는 절대 좋은 무대를 설치할 수 없습니다. 작품을 읽고 해석하고, 거기서 어떤 개념을 도출하는 작업을 거쳐야 상징적인 무대를 꾸밀 수 있습니다.”
박 교수가 최근 작업한 오페라 ‘루살카’는 체코판 인어공주 이야기다. 그는 잔잔한 호수 위로 콘크리트 감옥 같은 사각 무대가 밀고 들어오게 했다. 문명이 자연을 침범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마지막에 무대에 내린 비는 문명과 자연의 화해를 상징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 이 공연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고민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학부에서 전공하지 못했다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홍익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용인대 등에서 무대 디자인 대학원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