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입사 6개월 만에 나가라고?…2030 명퇴시대 자화상
유통 대기업에 다니는 김 대리(34)는 지난 한 달 내내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경기 침체에 따른 실적 부진으로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면서 300여개에 달하는 팀 중 절반 이상을 통폐합한다는 소문이 돌아서다. 통폐합하면 구조조정이 뒤따를 게 분명했다.

평소 좋은 실적을 내지 못한 팀의 팀장은 한 달이란 짧은 기간에 이직 자리를 찾아 다니느라 업무에서 사실상 손을 뗐다. “우리 애 아직 초등학교 입학도 안 했는데…”라며 축 처진 어깨로 흡연실로 향하는 동료가 많았다.

[김과장 & 이대리] 입사 6개월 만에 나가라고?…2030 명퇴시대 자화상
소문은 최근 사실로 드러났다. 조직개편 공고가 붙었고, 팀 절반가량이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사라진 팀의 팀장 및 간부급 직원들은 지방이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20대 후반~30대 중반의 젊은 직원 중에서도 회사를 떠나야 할 처지에 몰린 사람이 많았다. 김 대리는 “대폭 줄어든 팀과 인력에 모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구조조정 태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다음번에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20~30대 샐러리맨들이 불안감에 떨고 있다. 산업계 전반에 걸쳐 희망퇴직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엔 희망퇴직의 주요 ‘타깃’이 부장급 이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대리급은 물론 20~30대 사원으로 연령대가 내려왔다. 직장인들이 참여하는 익명 게시판 앱(응용프로그램) ‘블라인드’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중 7명은 직·간접적으로 희망퇴직 압박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젊은 직장인 사이에서는 “더 이상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부품’ 같은 신세가 되고 싶지 않다”며 창업하거나, 안정적인 미래를 찾아 공기업 문을 두드리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왕 나가야 한다면 적극적으로 명예퇴직을 신청해 명예퇴직금을 받아야겠다”는 젊은 샐러리맨들도 있다.

‘2030 명퇴 시대’의 신(新)풍경

재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박모씨(28)는 지난해 ‘20대 명퇴’의 당사자가 됐다. 그의 전 직장은 신입사원을 희망퇴직 대상에 포함해 논란이 된 대기업.

2년차 사원이던 그는 사원도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언젠가 쫓겨날 거 지금 나가자’며 대책 없이 회사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퇴사 후 갈 길이 막막했다. 취업시장의 벽은 더욱 높아져 있었다.

2년을 꽉 채우지 못해 경력직 이직도 힘들었다. 그는 “지난 2월부터 실업급여를 신청해 받고 있다”며 “국가에서 인정하는 백수가 됐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조선·해운업계 구조조정이 가시화하면서 해당 업종 종사자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조선·해운업계 구조조정이 본격 이뤄지면 최대 3만명이 넘는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회사 앞에 치킨집 차리면 많이 놀러 와줘.” 해운사에 다니는 박 대리(33)는 요즘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초등학교 동창부터 동호회 회원들까지 “뉴스를 보다 네 생각이 났다” “회사 분위기는 어떠냐”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어서다.

박 대리는 내년 초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할 여자 친구의 부모님도 내심 불안해하는 눈치다. “회사 이름이 매일 뉴스에 오르내리니까 몇 년 동안 연락도 안 하던 친구들까지 연락이 옵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자조 섞인 농담으로 승화시킬 지경이 됐어요.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결혼을 미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요즘 잠이 오지 않습니다.”

공기업 이직·창업 준비 ‘붐’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가 싫어 공기업 이직을 준비하거나 창업을 생각하는 직장인도 늘어나고 있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신입사원 김모씨(30)는 입사 6개월 만에 상사로부터 황당한(?) 말을 들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신입사원은 더 이상 진급이 힘들어.” ‘신입사원은 진급이 힘들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이 상사는 김씨에게 명예퇴직을 에둘러 권한 것이었다.

상사의 퇴사 종용에 못 이겨 입사 동기들은 하나둘 회사를 그만두기 시작했다. 김씨는 직장생활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회사를 옮겨도 위기가 닥치면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개인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입사 12개월 뒤부터 희망퇴직이 가능하기에 몇 개월만 더 버틸 생각입니다.” 김씨는 퇴직금을 받은 뒤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집 근처에 작은 카페를 차릴 계획이다.

국내 대형 증권사에 재직 중인 신 대리(31)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는 최근 한 달째 팀장과 면담하고 있다. 상담은 언제나 희망퇴직 대상자에게 전달하는 암묵적인 퇴사 권유로 끝났다. 윗선의 뜻을 알면서도 신 대리는 짐짓 모르는 척 한 달을 버텨왔다.

신 대리는 이 기간에 꾸준히 이직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려운 업계 상황에 그를 받아주겠다는 대형 증권사는 없었다. 구직활동에 지친 그는 7~9급 공무원 시험을 보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신 대리는 “이직해서도 언제 희망퇴직 대상이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사느니, 월급이 많이 줄더라도 마음 편하게 공무원으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목돈 마련 기회…희망퇴직 기다려요”

누군가에겐 악몽 같은 희망퇴직이 누군가에겐 기다려지는 이벤트이기도 하다. 대형 건설사에서 2년째 근무하고 있는 김 사원(28)은 지난주 직장동료인 최모씨(27)를 만난 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1억원이 넘는 퇴직금을 받고 희망퇴직한 최씨가 부러워서다.

올해 초, 김 사원은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했다. 현장을 전전하는 생활이 그에게 맞지 않았다. 회사의 비전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침 회사는 대리급 이상에게만 받던 희망퇴직을 1~2년차 사원급까지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사원에겐 약 1억2000만원, 대리급에겐 약 1억4000만원이 퇴직금 및 위로금으로 지급됐다. 김 사원은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해외 연수·석박사 교육 프로그램 등 회사가 제공하는 기회도 사라졌다”며 “이직이나 공기업 재취업을 준비하는 동료들이 꽤 많이 신청했다”고 귀띔했다. 김 사원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회사로부터 “업무에 반드시 필요한 인원으로 희망퇴직 대상자에서 제외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번 희망퇴직을 끝으로 앞으로 희망퇴직은 없다”는 공지와 함께 말이다.

“막차를 타고 희망퇴직에 성공한 동료들이 부러울 따름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일단은 회사를 다니면서 진로를 고민할 계획입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