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찌민시 하이밧쭝거리에 있는 신한베트남은행 본점. 신한베트남은행은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3년 만에 고객 수를 40만명으로 늘렸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
베트남 호찌민시 하이밧쭝거리에 있는 신한베트남은행 본점. 신한베트남은행은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3년 만에 고객 수를 40만명으로 늘렸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
신한은행은 2012년 베트남법인 영업 전략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1993년 베트남에 처음 진출한 이후 한국 기업과 현지 동포를 상대로 영업해 왔으나 실적 증가세가 주춤했다.

2011년 들어 베트남 경제사정이 급변한 탓이다. 최대 국영 조선기업인 비나신그룹의 부도 여파로 베트남 경제가 휘청였다. 베트남을 빠져나가는 한국 기업도 늘기 시작했다. 허영택 신한은행 글로벌사업그룹장(부행장)은 “한국 기업, 동포 영업에만 매달려선 앞이 안 보인다는 생각에 2013년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소매 영업을 시작했다”며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 현지화 전략은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2013년 21만여명이던 현지 개인고객은 지난해 말 40만명으로 두 배가량으로 늘었다.

한동안 국내 은행의 해외 진출 전략은 비슷했다. 해외에 공장을 짓는 국내 대기업을 따라 들어가 현지 공장 및 협력업체 직원 등을 상대로 예금을 받고 대출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무늬만 해외 진출이지 ‘동포 은행’이란 비아냥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최근의 해외 영업 전략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한국 기업이 아니라 현지 기업, 동포 대신 현지인을 파고드는 토착 영업을 강화하고 있다.

토착 영업 승부 건 신한은행

< 닻 올린 신한인도네시아은행 > 신한은행(행장 조용병·가운데)은 지난해 인수한 인도네시아 현지 은행 BME의 명칭을 ‘신한인도네시아은행’으로 바꾸고 17일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신한인도네시아은행은 올해 말 또 다른 현지 은행 CNB를 합병할 계획이다. 신한은행 제공
< 닻 올린 신한인도네시아은행 > 신한은행(행장 조용병·가운데)은 지난해 인수한 인도네시아 현지 은행 BME의 명칭을 ‘신한인도네시아은행’으로 바꾸고 17일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신한인도네시아은행은 올해 말 또 다른 현지 은행 CNB를 합병할 계획이다. 신한은행 제공
베트남엔 은행이 많다. 외국계 은행을 합해 48곳이나 된다. 한국에서도 광주·전북은행을 빼고는 모두 진출했다. 3~4년 전부터 베트남 현지은행이 한국 기업과 리테일(소매금융) 시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익성이 좋다는 판단에서다. 김한모 우리은행 호찌민지점장은 “베콤뱅크, 아그리뱅크 등 현지 은행들도 ‘코리아데스크’를 개설해 한국 기업 유치에 나섰다”며 “베트남은 지금 은행의 전쟁터”라고 전했다.

한국 기업과 동포 상대 영업에 안주하던 국내 은행엔 비상이 걸렸다. 가장 빨리 변화에 나선 건 신한은행이다. 신한은행은 2013년부터 역으로 현지인 대상 소매금융과 현지 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하기 위한 토착 영업에 본격 나섰다. 현지인 대상의 자동차 구입대금 대출부터 취급했다. 2014년에는 베트남 기업 근로자를 겨냥한 대출도 내놨다. 월급의 4~5배 되는 돈을 미리 대출해준 뒤 분할상환으로 갚게 하는 상품이다. 대출금리를 현지 은행보다 5%포인트가량 낮춘 덕분에 1년 만에 1만여명의 현지인 고객을 확보했다.

[소프트 수출파워 세계를 연다] 한국 기업서 현지인으로 타깃 변경…신한은행, 베트남 개인대출 16배 ↑
토착 영업의 성과는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2012년 말 700만달러이던 개인대출 잔액은 지난해 말 1억1000만달러로 약 16배로 늘었다. 지금도 매달 500만~700만달러씩 증가하고 있다. 허 그룹장은 “내년에는 개인 대출 규모가 2억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현지 기업 대출도 3년 새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대출을 받은 현지 기업 수는 2012년 300여곳 남짓에서 지난해 말 546곳으로 증가했다.

우리은행도 현지화 영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5월부터 현지인 대상의 신용대출과 주택담보대출을 시작했다. 이 가운데 개인 신용대출은 지난해 말 600여건에서 올 연말에는 2000건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초점은 현지인 대상 소매 영업

국내 은행의 토착 영업은 베트남 이외 다른 국가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지난해 필리핀 마닐라지점의 인테리어를 확 바꿨다. 지점 카운터 높이를 낮추고 의자를 배치했다. 손님이 앉을 의자를 두지 않는 현지 은행과 차별화하기 위해서다. 은행 계좌를 개설할 때 수수료를 받는 현지 은행과 달리 계좌 개설 수수료도 없앴다.

김기형 KEB하나은행 마닐라지점장은 “1995년부터 21년간 동포를 대상으로만 영업하다보니 성과랄 게 없었다”며 “현지인 대상의 소매금융을 올해부터 대대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필리핀 보니파시오에 지점을 연 기업은행도 현지인 채용으로 토착 영업에 나섰다. 지점 전체 직원 18명 중 지점장 등 3명을 뺀 15명을 필리핀 현지인으로 뽑았다. 김규갑 기업은행 마닐라지점장은 “자동차 할부금융 등 개인을 대상으로 한 영업을 확대하기 위해 현지인 채용을 늘렸다”고 설명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해외에 진출한 국내 은행의 현지 고객 비율은 2014년 75.3%에서 지난해 83.1%로 올랐다. 같은 기간 한국 기업 혹은 동포가 아닌 현지인 예금 비율도 56.4%에서 57.3%로 소폭 상승했다.

호찌민=이태명/마닐라=김일규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