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프랑스의 카르카손 요새도시. 카르카손관광청 제공
중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프랑스의 카르카손 요새도시. 카르카손관광청 제공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 창밖으로 지중해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순간 앗,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진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한참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치 기차 안은 극장, 창문은 스크린 같았다. 기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더욱 편안한 기분이 든다. 기차가 캄캄한 터널에 들어서자 마치 영화 한 편이 끝난 듯하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금방 또 다른 영화가 시작되니까. 프랑스 남부 지역을 간다면 한 번쯤 기차여행을 해야 한다. 숲, 바다, 작은 마을, 포도밭 등 다양한 정경을 감상하며 이동하다 보면 각 도시가 간직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귀를 간질인다.

앙티브 - 세계적인 휴양지가 부럽지 않은 곳

프랑스 지중해 기차여행의 출발지는 앙티브(Antibes)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약 910㎞ 떨어진 해안 마을 앙티브는 세계적인 휴양지 니스(Nice)와 국제영화제로 유명한 칸(Cannes) 사이에 있다. 도시의 인지도는 니스나 칸보다 낮지만 매력은 뒤떨어지지 않는다. 숙박할 호텔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바라본 앙티브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멋졌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잔잔하게 파도치는 지중해, 백사장에 누워 여유롭게 햇볕을 즐기고 있는 현지인들, 포트 보방(Port Vauban)을 촘촘하게 메운 요트, 그 뒤로 보이는 카레 요새(Fort Carre)의 모습은 앙티브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이미지다.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인들이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세운 도시이자 기원전 2세기 로마에 합병된 앙티브에선 역사적인 건축물, 멋진 해변, 활기찬 시장,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 등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앙티브가 휴양도시로 변모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다. 유럽 각국의 부유층은 앙티브의 풍경에 반해 고급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 여유롭고 풍요로운 분위기는 지금까지 방문객의 마음을 느긋하게 하는 마력을 품고 있다.

앙티브의 지역 명소 중 한 곳은 피카소 미술관이다. 지금의 피카소 미술관은 원래 그리말디 가문의 성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앙티브로 피난 온 피카소에게 앙티브 시는 그리말디 성에서 작업해 줄 것을 제안했다. 피카소는 오래된 성채에서 뜨거운 예술혼을 불살랐다.

1946년, 성의 2층을 6개월간 작업실로 사용하며 다양한 작품을 그려낸 피카소는 그해 말 44점의 소묘와 23점의 회화를 기증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지금의 미술관이 탄생했다. 이곳에선 그의 대표작 ‘삶의 기쁨(Vivre de Joi)’을 비롯해 회화, 소묘, 도자기, 에칭 등 245점의 다양한 작품과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이곳에 전시된 ‘성게를 먹는 사람’은 그의 독특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최근 X레이 분석을 통해 이 작품 밑에 있는 다른 그림이 발견됐다.

다른 그림 위에 덧칠해 작품을 완성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현지 가이드는 “원래 작품을 본 피카소가 자신이 훨씬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재 미술가의 괴팍함마저 느껴지는 대목이다.
피카소미술관 인근의 그라베테 해변. 앙티브관광청 제공
피카소미술관 인근의 그라베테 해변. 앙티브관광청 제공
피카소 미술관 뒤에 있는 마르셰 프로방스는 각종 과일과 채소, 향신료와 허브, 갖가지 올리브, 생선 등을 파는 장터다. 그저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현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시장 근처에는 고흐가 사랑한 압생트를 파는 주점(L’Absinthe Bar)이 있다. 압생트는 가격이 싸고 알코올 도수가 70도에 이를 정도로 독해서 가난한 예술가에게 인기를 끈 술이다.

이 주점은 로마시대부터 있던 건물에 압생트 바를 차린 것이다. 예술가의 혼을 사로잡은 압생트를 분위기 있는 곳에서 마셔보고 싶다면 방문해볼 만하다. 앙티브 관광청 antibesjuanlespins.com

엑상프로방스 - 세잔이 사랑한 물의 도시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프로방스(Provence)는 사실 프랑스의 특정 행정구역이 아니다. 프랑스 남동부 지중해 해안지역과 근처의 내륙지역 일대를 아우르는 용어로 한국의 ‘남도지방’에 해당한다.

초고속열차 테제베(TGV)의 식당칸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 여행객
초고속열차 테제베(TGV)의 식당칸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 여행객
프로방스의 중심 도시는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다. 니스에서 초고속열차 테제베(TGV)를 타면 엑상프로방스까지 약 3시간이 걸린다. 엑상프로방스의 ‘Aix’는 라틴어로 물이라는 뜻. 그만큼 물이 풍부한 곳으로 이곳의 광천수는 로마시대부터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도시 어디서나 분수를 볼 수 있다. 프랑스에는 미술가로 대표되는 도시들이 있다. 아를이 빈센트 반 고흐, 생폴드방스가 마르크 샤갈로 유명하다면 엑상프로방스는 단연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의 도시다.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줄곧 고향의 풍광을 화폭에 담은 세잔은 이제 도시의 상징이 됐다. 세잔의 도보 코스도 있다. 보도에 ‘C’라고 새겨진 표지판을 따라 걷다 보면 세잔의 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엑상프로방스의 중심지인 미라보 거리
엑상프로방스의 중심지인 미라보 거리
많은 분수 중에서도 큰 규모가 돋보이는 로통드 분수(Fontaine de la Rotonde)를 지나면 바로 미라보 거리(Cours Mirabeau)가 나타난다. 1650년에 만든 광장으로 지금은 도시의 중심지가 됐다. 나이가 수백살이 넘은 가로수가 길가에 늘어서 있고, 길을 따라 각종 레스토랑, 노천카페, 바 등이 숨 돌릴 여유를 준다. 이곳에는 세잔이 자주 들렀다는 카페 ‘뒤 가르송’이 있다. 초록색 차양이 근사하게 드리워진 곳으로 1792년에 개장했다.

세잔의 장례식이 치러진 생 소뵈르(Saint-Sauveur) 대성당은 미라보 거리에서 약 700m 떨어져 있다. 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지은 건물로 각 시대의 건축양식을 담은 축소판이다.

가장 오래된 부분은 2세기에 지어졌고 6세기의 세례당, 12세기의 수도원, 14세기에 지은 종탑 등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프로방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와이너리다. 샤토 라 코스테(chateau-la-coste.com/en)는 엑상프로방스의 멋진 자연과 함께 와인, 미술품이 하모니를 이루는 독특한 곳이다. 와이너리 그 이상을 표방하는 곳으로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어 짬을 내 다녀올 만하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아트센터를 비롯해 다양한 현대 미술품을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아트센터 안에 있는 안도 다다오 레스토랑에선 프로방스, 지중해의 재료로 만든 요리를 이곳에서 직접 생산하는 와인과 함께 맛볼 수 있다. 엑상프로방스 관광청 aixenprovencetourism.com

나르본 - 와인에 취하고 전원에 젖어든다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나르본 시가지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나르본 시가지
나르본(Narbonne)은 엑상프로방스에서 약 241㎞ 떨어져 있다. 스페인 철도청(렌페)의 초고속열차인 아베(AVE)를 타니 약 2시간16분 걸렸다.

인구 5만명의 나르본은 기원전 118년에 세워진 작은 도시다. 로마가 이탈리아 외부에 최초로 세운 식민지로, 약 26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오랜 역사답게 도시 곳곳에는 중세시대 분위기도 한껏 살아 있다.

과거 나르본은 로마에서 스페인 북부까지 연결되는 가도가 통과하는 길목이었다. 나르본 시청사 앞 광장에는 움푹 파인 장소가 있다. 로마제국이 최초로 건설한 가도인 비아 도미티아(Via Domitia)의 일부다. 돌이 깔린 울퉁불퉁한 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차가 지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라퐁텐의 말이 되새겨지는 순간이다.

유서 깊은 도시의 역사보다 더 무르익은 것은 나르본의 와인이다. 나르본은 랑그독 루시옹(Languedoc-Roussillon) 지방에 속해 있다. 랑그독 루시옹은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에서 페르피낭에 이르는 와인 재배 지역으로 프랑스 전체 와인의 30% 정도를 생산하고 있다. 이곳의 와인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현재 우량 와인을 뜻하는 AOC 등급을 받는 비율이 전체의 14%에 이른다.

나르본 시내를 오가는 기차 프티트랑
나르본 시내를 오가는 기차 프티트랑
나르본에서는 클래식 자동차를 타고 와인투어를 할 수 있는 독특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빨간 옷을 입은 가이드가 직접 운전을 해서 와이너리로 안내해주기 때문에 무척 편리하다. 비용은 1인당 75유로(약 10만원). 반나절 일정으로 프랑스 남부의 자연과 와인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쯤 이용해볼 만하다. 이용을 원한다면 업체 홈페이지(vin-tourisme-mediterranee.com)에서 15일 전에 신청하면 된다. 교외로 향한 자동차는 이 지역의 와인 제조사인 샤토 카피툴(chateau-capitoul.com)이 소유한 언덕 위의 포도밭으로 올라갔다. 빽빽한 포도나무와 저 멀리 펼쳐진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마시는 와인 맛은 다른 때보다 더 특별함을 선사했다.

나르본 시내에는 오드 강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32㎞ 길이의 로빈 운하가 흐른다. 산책하는 시민들, 편히 앉아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에서 작은 마을이 간직한 여유가 느껴진다. 운하 옆에는 실내시장인 레 마르셰(Les marches de Narbonne)가 있는데 안에 들어가니 제과점, 정육점, 생선가게, 청과물, 바, 와인바 등 70여개 상점이 자리잡고 있다. 내부의 와인상점(lestapasdelaclape.com)에서는 타파스 요리와 20여 업체에서 사온 100종류 이상의 와인을 맛볼 수 있다. 시장의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훌륭한 음식에 곁들이는 와인은 여행의 피로마저 씻어 내리기에 충분했다. 나르본 관광청 narbonne-tourisme.com

카르카손 - 중세시대의 웅장한 요새

2000년에 발매돼 전 세계에서 600만개 이상 팔린 보드게임 카르카손(Carcassonne)은 프랑스의 도시 이름이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국경을 넘기 전에 있는 카르카손은 나르본에서 동쪽으로 약 60㎞ 떨어져 있고 기차를 타면 30분 만에 닿는다. 이곳을 상징하는 건축물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카르카손 성이다. 카르카손은 작은 도시지만 성의 유명세 덕분에 연간 350만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프랑스 도시 중 파리와 몽생미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숫자다.

기원전 122년, 로마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켈트족을 몰아낸 뒤 성벽을 쌓은 것이 카르카손 성의 기원이다. 성벽에는 52개의 탑이 있으며 길이 1650m의 외벽, 1250m의 내벽으로 구성된 이중구조로 지어졌다. 안쪽 성벽은 서고트의 왕 외리크 1세가 485년 축조했고, 바깥쪽 성벽은 1285년 필리프 3세가 지었다. 오랜 기간 짓다 보니 성에는 로마시대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건축양식이 녹아 있다. 멀리서 바라본 카르카손 성은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천상의 요새와 같은 모습이다. 성벽 안의 번화가를 의미하는 시테 지역으로 들어가면 좁은 길을 따라 과거 중세시대 사람들이 쓰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레스토랑, 식당, 바, 카페, 기념품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와 현재가 뒤섞인 듯한 모습이다.성에서 들러볼 만한 곳은 생 나제르(Saint Nazaire) 성당이다. 1069년 공사를 시작해 1130년에 지어진 성당이다. 성당 옆에는 드 라 시테 호텔(hoteldelacite.com)이 있다. 고성을 개조한 호텔로 1920년부터 3대째 운영 중이다. 총 60개의 객실이 있고 최신식 호텔과 달리 고전적인 분위기가 방문객을 압도한다. 카르카손 관광청 tourism-carcassonne.co.uk

엑상프로방스(프랑스)=김명상 기자 terry@hankyung.com

여행 Tip - 佛 철도 패스 하나면 15일간 무제한 이용

[여행의 향기] 칙칙폭폭!…남프랑스 지중해를 달린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여행은 기차로 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주요 기차역이 도심에 있기 때문에 다른 대중교통을 이용해 숙소나 관광지로 이동하기 쉽다. 또한 도로 정체가 없어서 계획대로 시간을 쓸 수 있고, 넓고 쾌적한 좌석에서 쉬거나 잘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3회 이상 기차를 타야 한다면 ‘프랑스 철도 패스’가 딱이다. 프랑스 국철 노선을 타고 3000곳이 넘는 프랑스 전역의 역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유이용권이다. 초고속열차 테제베(TGV)를 포함해 일반기차, 지방열차 등 프랑스 국영 철도청(SNCF)이 운영하는 열차를 최저 2일부터 최대 15일까지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여행의 향기] 칙칙폭폭!…남프랑스 지중해를 달린다
프랑스 철도 패스는 유럽 기차 승차권의 세계 1위 배급사인 레일유럽(raileurope.co.kr)에서 살 수 있다. 2일 연속권의 경우 성인 125유로(약 16만6000원)부터. (02)755-96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