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자신의 말 뒤집은 반기문 총장
“정치적 일정은 전혀 없다. 정치인을 만날 계획도 없다. 한국 방문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언론이 문제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최측근인 김원수 UN 사무차장이 지난 19일(현지시간) UN 주재 한국대표부에서 뉴욕특파원단에 한 얘기다. 반 총장 방한을 닷새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하루 전인 18일 반 총장은 코리아소사이어티가 뉴욕 맨해튼 플라자호텔에서 주최한 연례 만찬 기조연설을 하기 위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반 총장은 “임기가 아직 7개월이나 남았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했다.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올려놓고 한국 정치권과 연결시키려는 것은 총장직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한국을 찾은 반 총장 언행은 180도 달라졌다. 지난 25일 방한 첫 일정으로 관훈클럽토론에 나와 “퇴임 후 한국민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고민하겠다”며 대권 도전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28일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예방해 30분간 독대했다. 사전에 예고돼 있지 않은 전격적인 일정이었다.

UN 외교가와 동포 사회는 당황스러워했다. 당장 사무총장 퇴임 직후 정부직 진출을 제한하는 UN 결의를 위반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27일(현지시간) UN 언론브리핑에서 외신기자들이 이를 문제 삼았다.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최악의 총장’이라는 외신의 의도적인 깎아내리기에 빌미를 더해 준 셈이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무산된 북한 방문이 반 총장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추진했던 게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는 판이다. 분단국가 출신임에도 임기 10년 동안 북한을 못 가는 유일한 UN 사무총장으로 남게 됐다는 아쉬움도 들린다. 하지만 일련의 처신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연임한 UN 사무총장은 후반 임기 5년간 미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무한대의 권력을 갖는다”며 “반 총장이 그런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하는 UN 외교가의 목소리가 괜한 비판은 아닌 듯싶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