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6월1일 오후 4시2분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합병을 반대한 주주들의 주식매수 청구가격을 높여야 한다는 법원 결정이 경제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합병과 분할, 사업양도 등 주식매수 청구권 부여를 동반하는 기업 구조조정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비송(非訟:민사사건 중 특정 쟁점에 대해서만 신속하게 결정을 받는 비소송 형태 사건)의 특성상 재판부 재량에 따라 기업의 합법적 의사결정을 뒤집을 수 있어 향후 구조조정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다.
[마켓인사이트] 법원 "주식매수청구가격 올려 다시 산정하라"…기업 합병·분할에 '불똥' 튀나
“무리한 추정” vs “재판부 권한”

서울고등법원 민사35부(부장판사 윤종구)는 지난 2월 말 삼성물산 주식을 2.11% 보유한 일성신약 오너 일가가 삼성물산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매수 청구가격 결정신청 사건에서 주당 가격을 5만7234원에서 6만6602원으로 올리라고 지난달 30일 결정했다. 재판부는 “삼성물산 주가는 합병에 관한 이사회 결의일 이전부터 이미 합병 계획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며 “합병이사회 결의일 전일 무렵의 삼성물산 주가는 삼성물산의 객관적 가치를 반영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고 이유를 밝혔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자본시장법에 따라 산정한 주가가 잘못됐다고 한 것이다. 자본시장법 관련 시행령은 합병 이사회 결의일로부터 3개월-1개월-1주일 가중평균 주가를 산술평균낸 값을 주식매수청구 가격으로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대주주 일가의 이익을 위해 삼성물산이 건설 수주에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나서는 등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췄다고 의심할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놓고 경제계에선 법원의 자의적 추정, 비합리적 가정에 따른 결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하지만 이 같은 시각과 별개로 최근 법원이 비송 사건에서 재판부가 가진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많다.

삼성이 반발하는 이유

비송 사건은 소송과 마찬가지로 민사적 쟁점을 다루지만 가격 등 단일 쟁점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린다. 양측의 변론을 듣고 이를 토대로 선고하는 ‘변론주의’를 따르는 민사 소송과 달리 법원이 직접 조사한 사실을 바탕으로 결정하는 ‘직권탐지주의’를 택하고 있다. 법원은 이에 따라 사건 관계자들에게 자료를 요청하거나 스스로 수집할 수 있으며 해당 자료를 근거로 자율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지금까지는 기업이 스스로 제출하는 자료에만 근거해 중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분석이다. 판사들이 여론 등을 의식해 기업이나 증권 관련 비송 사건에 대한 직접조사 필요성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번 결정처럼 재판부가 언론 보도나 증권사 보고서 등에 의존하는 ‘조사’ 정도로 주가의 적정성을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피신청인인 삼성 측은 재판부에 이례적으로 격한 반응을 내놓았다.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은 1일 기자들과 만나 “(이번 법원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적극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합병 추진 당시 제일모직(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이었던 윤주화 삼성사회공헌위원회 사장 역시 “(이번 결정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다른 기업들도 ‘긴장’

삼성물산 외에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 측이 책정한 주식매수가액에 대해 주주들이 이의를 제기한 비송 사건이 다수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가 2012년 인수한 비상장사 세크론의 소액주주들이 제기한 사건에서 2심 재판부는 “삼성 측이 시장가치에 근거해 책정한 8만5000원이 적합하지 않다”며 “12만4490원으로 올리라”고 결정했다. 2014년 현대엠코와 합병한 현대엔지니어링 소액주주들이 제기한 사건도 2심이 진행 중이며, 청주MBC에 합병된 충주MBC 주주들도 1심 법원의 심리를 받고 있다.

기업들은 이번 삼성물산 결정처럼 재량이나 추정을 근거로 한 판단이 다른 재판부로도 확산될 경우 구조조정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기업에 반드시 필요한 기업합병이나 분할이라 하더라도 소액주주 등과의 법적 갈등이 예상될 경우 구조조정 자체를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정소람/정지은 기자 ram@hankyung.com